Part5. "함께"의 깨달음 2

(12) 하버드와 MIT, 그리고 보스턴의 노을

by 윤예진

보스턴 일정 중에서 내가 가장 기다리던 날이었다.

오늘은 캠퍼스 투어를 하는 날. 보스턴에는 명문 대학이 많지만, 우리는 그중에서도 하버드와 MIT를 가기로 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하버드.



숙소에서 대중교통으로 40분 정도. 오렌지 라인을 타고 환승하고, 버스로 하버드 스퀘어에 도착했다. 중심 관광지와는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하버드를 안 갈 수는 없었다.


하버드는 내게 ‘처음’이 아니라 ‘다시’였다.

언니와 내가 10년도 더 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다. 아주 어릴 때, 미국에서 짧은 프로그램을 했고 그 전후로 가족처럼 여기저기를 따라다녔다. 기억은 대부분 흐릿한데, 하버드 동상 앞에서, 동상 구두 앞코를 만지고 사진을 찍던 순간의 장면은 또렷했다.


이번에는 동생과 왔다.

어릴 때는 걸어 다니며 무엇을 봤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게 조금 아쉬웠다. 그래서일까. 내가 지금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이유가 더 분명해진다. 시간은 기억을 천천히 지운다. 어느 날 문득 “분명 좋았는데, 뭐가 좋았더라?” 하고 멍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게 너무 비통해서, 나는 이번 여행만큼은 가능한 한 많이 남기고 싶었다. 사진을 찍고, 순간을 적고, 다시 읽을 수 있게. 지금도 나는 여행이 끝난 뒤 사진을 스크롤하며 그날의 표정과 공기와 온도를 더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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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하버드 스퀘어의 ‘The Coop’을 먼저 들렀다.

하버드 북스토어 겸 기념품샵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자주색 모자였다. H 이니셜이 박힌, 하버드의 상징 같은 색. 우리 둘은 장난처럼 모자를 써보고 거울 셀카를 찍었다. 나는 원래 자주색이 잘 어울리지 않는 편인데, 생각보다 얼굴이 환해 보였다. 탁하지 않은, 투명한 자주색이라서 그랬을까.


하지만 결국 모자는 내려놓았다.

미국에서 쓰고 다니기엔 너무 “하버드생” 같았다. 나는 하버드생이 아니니까. 하버드 모자를 쓰고 활보하는 모습이 조금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대신 우리는 매장을 천천히 둘러봤다. 후드티나 맨투맨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동생의 시선은 다른 곳에 꽂혀 있었다.

텀블러 코너. 동생은 여행 내내 ‘텀블러 무새’가 되었다. 어디를 가든 “텀블러 사고 싶다”를 반복했다. 하버드 텀블러도 제일 먼저 보러 갔다. 마음에 드는 큰 사이즈 텀블러를 찾았지만,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아래쪽에 찍힌 자국이 꽤 있었다. 다른 제품이 있는지 찾아보고 직원에게 물었지만, 그게 마지막 남은 재고라고 했다. 우리는 고개를 저으며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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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올라가 창가 테이블에 잠시 앉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재정비 시간이 정말 중요하다. 차가 없고, 계속 걷고, 계속 구경하고, 계속 이동하면 몸이 금방 바닥난다. 잠깐 앉아 숨을 고르면 하루의 속도를 다시 잡을 수 있다. 우리는 먼지를 털어내듯 몸과 마음을 정리하고, 드디어 캠퍼스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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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지나자 푸른 잔디가 펼쳐졌다.

햇빛을 받은 잔디는 평화로웠고,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의 속도도 한결 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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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관광객답게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다른 관광객에게 부탁해 남매 사진을 남겼다. 청설모가 지나갔고,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 현대적인 건물도 섞여 있었다. 걷는 것만으로도 “역사가 쌓인 공간”이라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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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에서는 건물을 보는 재미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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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꼬르뷔지에 건축물


동생과 나는 건축물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캠퍼스를 걷다 ‘저건 어디서 봤던 결인데’ 싶은 건물이 있었고, 알아보니 실제로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었다. (이런 확인 과정까지 포함해서) 보스턴의 캠퍼스 투어가 더 흥미로웠다. 눈앞에서 보는 건물은 사진으로 봤을 때와 다르게 ‘규모’와 ‘비례’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건 직접 걷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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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를 짧게 걸은 뒤 우리는 MIT로 이동했다.

MIT에 오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하나였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스테이타 센터(Stata Center)를 보고 싶어서. 건축을 깊이 공부한 건 아니지만, 대학 시절 ‘수박 겉핥기’로 건축가들의 작품을 훑어본 적이 있고, 프랭크 게리는 그때도 유독 강렬했다. “어떻게 이런 형태를 생각하지?” 싶은, 익숙함을 일부러 깨는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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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건물의 일부가 보이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윗단에 올라가자 장난감 같은 건물 덩어리들이 서로 어긋나며 서 있었다. 곡선과 직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금속처럼 빛을 반사하는 표면은 햇빛에 따라 색이 달라 보였다. 내부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외관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들어가지 못하니 상상할 여지가 생겼다. “저 안은 어떻게 연결돼 있을까?” “사람은 어떤 동선으로 이동할까?” 동생과 나는 말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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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는 찰스강 쪽으로 걸었다.

강을 바라보는 리버뷰는 정말 멋졌다. MIT의 위엄은 건물의 크기와 형태에서도 느껴졌다. 공과대학 특유의 단단함과 묘한 깔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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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MIT 북스토어를 들렀다가,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이동했다.

오후 4시쯤. 버스를 타고 코플리 플레이스(Copley Place) 근처로 돌아왔다. 보스턴에서 꼭 먹어야 한다는 음식—클램차우더를 먹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의 노을은 또 한 번 나를 멈춰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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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빛 햇살이 건물에 비치고, 푸른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브라운 계열 건물들이 그 사이에서 더 깊은 색을 띠었다. 보스턴에 도착한 날부터 이런 장면을 계속 봤다. 우연인지, 이 도시가 원래 이런 도시인지 헷갈릴 정도로. 자꾸 엽서 같은 풍경이 현실에서 반복됐다.


우리는 커먼웰스 애비뉴 몰(Commonwealth Avenue Mall)을 따라 걸었다.

길게 이어진 공원 같은 길, 그 양옆으로는 주택들이 단지처럼 붙어 있었다. 해가 더 지기 시작하자 골목은 어두워졌고 우리는 조금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 그 어둠마저 보스턴의 빈티지한 결을 더 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영화 촬영이 있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저녁은 ‘Legal Sea Foods’에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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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램차우더와 랍스터 꼬리 요리, 그리고 봉골레 파스타를 주문했다. 클램차우더는 생각보다 짰지만, 그 짠맛이 빵과 만나면 묘하게 균형이 잡혔다. 빵을 국물에 찍어 먹으니 버터 풍미가 더해져 부드럽게 넘어갔다. “본토에서 먹는 건 다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속이 따뜻해지고, 몸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랍스터 요리는 올리브오일 소스를 곁들여 먹으니 풍미가 더 살아났다.

우리는 말수를 줄이고, 접시를 비우는 데 집중했다. 오늘 하루는 걷고 보고 감탄하고 또 걸었던 날이다. 몸이 지쳤지만, 이런 날의 저녁은 꼭 맛있어야 한다. 다행히 오늘은 성공이었다.


숙소까지는 걸어서 11분.

그 짧은 거리가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는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 프런트 직원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복도 정수기에서 물도 받아오고, 샤워 용품을 챙겨 ‘힐링 공간’ 같은 샤워실로 향했다. 깔끔한 인테리어와 청결한 공간에서 하루의 먼지를 털어냈다.


침대에 누워서는 간단한 간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트레이더 조에서 사둔 베이글, 크림치즈, 망고주스, 우유, 시나몬 시리얼, 베이글 과자. 그리고 워싱턴에서 받았던 와플이 생각나, 보스턴에서도 비슷한 와플을 다시 사두었다. “입이 허전할 때를 대비해”라는 핑계는 언제나 그럴듯하다.


오늘 하루, 우리는 여유롭게 보스턴을 걸었다.

하버드에서 기억과 기록을 떠올리고, MIT에서 건축의 설렘을 만지고, 노을 아래서 보스턴의 색을 다시 확인했다. 이 도시는 참... 지는 빛이 잘 어울리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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