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프라이빗 투어를 만난 보스턴에서
보스턴을 '본격적으로' 걷는 첫날이었다.
우리의 첫 일정은 노스이스턴 대학교를 지나 보스턴 미술관(MFA Boston)으로 가는 것. 지도에 찍힌 동선을 따라 걷다 보니 캠퍼스 근처에 도착했고, 마침 점심시간을 앞둔 학생들이 우르르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무리에 자연스럽게 섞였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대학가 거리를 걸으며, 잠깐은 타지인이 아니라 이 학교의 학생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낯선 도시에서 아주 짧게 얻는 ‘소속감’ 같은 것. 그 기분이 좋았다.
학생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미술관 앞에 섰다.
MFA Boston은 다른 미국 도시에서 봤던 미술관들처럼 전형적인 유럽풍 건물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여긴 건물도 웅장해서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티켓을 끊고 들어가서, 어디부터 봐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꼭 봐야 할 작품’ 목록을 검색하며 동선을 정리하던 그때였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연세가 있는 할머니 한 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같이 투어 하실래요? 저는 도슨트예요. 오늘은 참여자가 없어서… 프라이빗 투어가 될 수 있어요.”
동생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무료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몰랐던 우리는, 뜻밖의 행운을 얻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도슨트 설명을 전부 알아듣기엔 어렵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집중이 됐다. 동생과 나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말씀해 주신 내용을 짧게 정리해 가며 따라 걸었다. 모르는 사람과 이렇게 오랜 시간, 같은 속도로 걸으며 이야기를 듣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설명을 다 알아듣진 못해도, 키워드들이 잡히기 시작했다. 작품 앞에 멈춰 서는 시간, 화면의 구도를 짚는 손짓, 작가의 배경을 설명하는 목소리—그 모든 것이 “전시를 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날 도슨트가 소개해준 아프리카계 화가의 작품은 특히 기억에 남았는데, 이후 다른 도시의 미술관에서 그 작가의 그림을 다시 마주쳤을 때, 나는 그 순간을 바로 떠올렸다. ‘아, 이거. 보스턴에서 들었던 그 이야기.’ 여행은 이렇게, 어딘가에서 이어진다.
투어가 끝난 뒤에는 우리만의 속도로 다시 걸었다.보고 싶은 그림 앞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나는 모네의 그림 앞에 멈춰 섰다. 노을이 스며든 풍경은 화면 밖으로도 빛이 번지는 것 같았고, 붓의 질감과 색의 겹이 묘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모네라고 하면 수련부터 떠올리곤 했는데, 보스턴에서는 수련 말고도 ‘모네의 여러 얼굴’을 본 느낌이었다. 그림은 말이 없는데도,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우리는 미술관 안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걸어 다닌 시간이 쌓이자 다리가 아파졌다. 그래도 이상하게 피곤함보다 ‘충만함’이 컸다. 보스턴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뜻밖의 공간에서 뜻밖의 방식으로 시작됐다.
밖으로 나와 초록색과 흰색 투톤의 지상철을 타고 백베이로 돌아왔다.
배가 고팠고, 무엇보다 바깥의 찬 공기를 마시다보니 몸이 추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따뜻하면서도 우리의 입맛을 자극해줄 자극적인 걸 먹기로 했다. 훠궈였다. 이때부터였을까. 이후 여행지에서도 계속 훠궈를 찾게 되는 ‘훠궈병’이 시작된 게.
우리가 간 곳은 ‘Happy Lamb Hot Pot’.
무제한 훠궈집이었는데, 내가 갖고 있던 ‘무한리필=저렴하지만 아쉬움’이라는 편견을 가볍게 깨버렸다. 사람은 많았고, 셀프바 재료는 계속 채워졌다. 우리는 반반탕을 골랐다. 뽀얀 국물과 마라 탕. 접시에 완자와 채소를 담아 와서 국물에 넣고, 소스도 직접 만들었다. 땅콩소스에 쪽파, 고추기름을 섞어 따뜻한 국물을 머금은 고기를 찍어 먹는데, 워싱턴에서 쌓인 추위가 그 한 끼에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글에서 계속해서 워싱턴의 추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보면 정말 얼마나 워싱턴이 추웠는지 독자들도 아실 것 같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동생이 아는 친구를 식당에서 만난 것이다. 한때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가 보스턴에 와 있었고, 우리가 간 그 식당에서 마주쳤다. 여행지에서 이런 우연을 만나면, 도시가 갑자기 가까워진다. 그리고 '세상이 좁구나'라는 걸 느끼게 된다.
해가 기울 무렵 식사를 시작했는데, 나왔을 땐 이미 밖이 어두웠다.
몸에서는 온기가 났고, 마음도 든든했다. 우리는 소화를 시킬 겸 숙소까지 걸었다. 15분 정도의 거리. 숙소 위치가 좋아서 어디든 걸어서 갈 수 있었다. 동생과 나는 도슨트 투어의 행운부터 모네, 훠궈, 우연한 만남까지—오늘 하루를 통째로 되감으며 “오늘 진짜 좋았다”라고 말했다. 미술관에서 3시간 가량 오래 서 있고 오래 걸어 다니느라 진이 빠지긴 했지만, 그만큼 오래 남을 날이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했다.
보스턴에서는 화장실과 샤워실을 공용으로 쓰는 형태의 방을 예약했는데, 의외로 그게 더 좋았다. 샤워실과 화장실이 정말 깔끔했고, 갈 때마다 스태프가 청소하며 관리하는 게 느껴졌다. 깨끗하고 인테리어가 마음에 드는 공간에서 샤워를 하는 기분이 이렇게 좋을 수 있나 싶었다. 우리는 매일 저녁 따뜻한 물로 샤워하며, 때로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루를 접었다.
방은 좁았지만, 2층 침대 덕분에 각자의 공간이 있으면서도 함께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보스턴에서 숙소생활을 하며 가장 인상 깊은 건, 거창한 전망보다도 이런 ‘편안함과 소소한 행복’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보스턴에 온다면, 나는 이 숙소를 다시 찾을 것 같다. 좁았지만 충분했고, 조용히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