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5. "함께"의 깨달음 2

(15) 샌프란시스코는 언덕 위에서 시작됐다

by 윤예진

전날 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꽤 큰일을 치렀다.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구식의 별장 같은 건물에서 하룻밤을 버텼다. 그런데도 아침이 오자 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어제의 불안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 햇빛이 맑았고, 무엇보다 ‘샌프란시스코의 아침’이라는 말이 주는 기대감이 컸다.


우리는 조식을 먹으러 메인 건물로 이동했다. 이 숙소를 예약한 이유는 명확했다. 매일 무료 조식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공용 주방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 주방은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는’ 공간이었다. 가스레인지와 조리도구, 각종 식기, 그리고 거대한 공용 냉장고와 냉동실까지. 방 번호와 이름을 적어 보관할 수 있게 해 둔 시스템이 신기했다. 숙소라기보다 작은 공동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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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은 화려하지 않았다. 바나나를 비롯한 과일, 식빵, 땅콩버터, 버터, 잼, 우유 등의 기본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 ‘기본’이 여행자에게는 가장 반갑다. 우리는 이미 여행 내내 땅콩버터를 들고 다녔다. 동생이 어느 날 베이글에 땅콩버터를 발라 먹고는 그 뒤로 크런치 땅콩버터 한 통을 주식처럼 껴안고 다녔기 때문이다. 아침에도, 간식에도, 야식에도.


그런데 보스턴에서 통을 거의 다 비워 버리고, 결국 버리고 왔다. 이제 끝이구나 싶었는데—조식 테이블 위에 땅콩버터가 다시 있었다. 동생과 나는 동시에 웃었다. “여기에도 있네.”


우리는 토스트기에 빵을 넣고, 바나나를 썰었다. 식빵이 ‘톡’ 하고 올라오자 따뜻한 빵 위에 땅콩버터를 두껍게 펴 발랐다. 따뜻한 열기에 땅콩버터가 조금씩 풀리며 윤기가 돌았고, 그 위에 바나나를 줄지어 올렸다. 한입 베어 물고 우유를 마셨다. 고소함과 달콤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사과보다 바나나가 더 잘 어울린다는 걸 그날 확신했다.


먹고 난 그릇은 설거지했다. 동생이 거품을 내어 닦고, 내가 헹궈 건조대에 올려두는 식으로. 우리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호흡이 잘 맞는 남매였다.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며, 서로 지치지 않게 하려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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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오자 샌프란시스코의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동부의 겨울과 달랐다. 패딩이 몸을 ‘무장’시키던 감각이 아니라, 가벼운 옷이 바람을 느끼게 했다. 숙소는 언덕 위에 있었고, 그곳에서는 금문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빨간 지붕들, 푸른 하늘과 바다, 그리고 다리의 붉은 선. 내가 상상했던 샌프란시스코보다 더 샌프란시스코 같았다. 언덕이라는 지형이 풍경을 완성시키는 도시라는 걸, 그때는 아직 몰랐지만 직감으로는 알았다.


시간은 오전 10시 반쯤. 전날 체크인 사고를 해결해 줄 담당자는 12시에 온다고 했다. 1시간 반을 숙소에서 기다리기는 아까웠다. 우리는 프런트에 들러 다시 확인했다. “12시에 오시는 거 맞죠? 저희는 잠깐 밖에 다녀올게요. 12시 이후에 다시 올게요.” 말을 남기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움직이고 싶어 근질거리던 몸이 그제야 풀리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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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목적지는 롬바드 거리. 숙소 언덕을 내려가는 길부터가 이미 풍경이었다. 한쪽으로는 바다와 금문교가 펼쳐지고, 반대편으로는 언덕 위 마을이 겹겹이 이어졌다. 키 작은 야자수 몇 그루가 푸른 잔디 위에 서 있었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 러닝 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관광지보다 ‘사는 도시’의 리듬이 더 크게 느껴졌다.


걸어서 20분.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의 습도와 온도를 그대로 맞으며 걸었다. 동생과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여기 진짜 좋다.” 이때의 첫인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미국의 도시들 중 가장 산뜻했다. 물론 내 마음속 1등은 여전히 뉴욕이지만—샌프란시스코는 ‘다른 종류의 좋음’이었다.



가는 길에는 알록달록한 집들이 있었고, 공원에서는 강아지가 잔디에 몸을 굴리며 놀았다. 목줄 없이도 주인 곁을 맴도는 강아지들. 자유로운데 질서가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내 마음도 풀렸다. ‘세상에 이런 평화가 있구나’ 싶은 순간이, 그 짧은 걸음 사이사이에 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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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언덕이었다. 롬바드 거리로 향하는 길에는 무서울 정도의 경사가 있었다. 45도는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내 몸은 그 정도라고 느꼈다. 레일이 깔려 있고 트롤리가 오르내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경사를 걸어 올라오는 건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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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착한 롬바드 거리. 구불구불 내려가는 길은 유명세만큼 ‘와!’ 하고 충격적인 장면은 아니었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전망이 좋았다. 거리 자체보다 그곳에 서서 보는 도시의 결이 더 기억에 남았다.


시간을 계산해 우리는 근처에서 하나를 더 하기로 했다. 기라델리 스퀘어.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한 번쯤은 마트에서 집어 들었을 그 기라델리의 ‘본진’이 여기 있었다. 내려가는 길이라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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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이스크림 대신 음료를 시켰다. 아침부터 걸으니 목이 말랐다. 초콜릿 셰이크는 진했다. 다크 한 초콜릿 맛이 입안을 꽉 채웠고, 예상보다 덜 부담스럽게 달았다. 1만 8천 원이 넘는 가격은 사악했지만, 여행지에서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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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샵도 구경했다. 접시 하나에 금문교, 알카트라즈, 롬바드, 피셔맨스 워프 같은 명소들이 그림처럼 담겨 있었다. ‘샌프란시스코가 이런 도시구나’ 한눈에 정리해 주는 물건이었다. 아직 첫날이라 그릇을 사기에는 타이밍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샌프란에서 꼭 하나는 기념품을 사자고 이미 합의해 둔 상태였다. 동생은 결국 미니 향수 하나를 골랐다. 샌프란시스코를 떠올리면 이 향수가 생각나겠지 라는 마음으로.


바다도 보고 싶었다. 내려온 김에 조금 더 걸었다. 1월 중순, 기모 맨투맨이 필요한 날씨였는데도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영을 하는 게 아니라, 거의 ‘훈련’ 같았다. 한 명씩 일정 시간이 되면 바다로 들어가고, 다시 나오고, 또 들어가고. 나와 동생은 그 광경을 한참 봤다. 도시가 주는 낭만이 때로는 이런 ‘이해할 수 없음’에서 완성된다는 걸 그날 배웠다.


우리는 골목길을 따라 숙소로 돌아왔다. 별장 같은 방에 있던 캐리어를 챙겨 프런트로 향했다. 이제는 확실하게 말해야 했다. “저희는 더 이상 저기서 잘 수 없어요.”


담당자로 보이는 남성 직원이 우리를 보더니 말하듯이 말했다. “오늘부터 투베드 룸 준비해 뒀어요.”

그 한 문장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어제의 불안이 한순간에 가벼워졌다.


우리는 안내받은 방으로 이동했다. 미로처럼 이어진 복도를 따라 내려가니 우리 방이 나왔다. 화장실과 샤워실도 멀지 않았다. 무엇보다 ‘관리되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확실했다. 방키를 받고 나서, 나는 프런트로 다시 올라가 전날 투베드 룸을 제공받지 못한 것에 대한 환불(1박 요금의 절반)을 처리했다. 우리는 방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히 안도했다.


여행에서는 큰 사건보다, 이런 작은 해결이 더 큰 행복이 된다.

동생과 나는 짐을 풀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햇살은 여전히 좋았고, 우리는 이제야 제대로 샌프란시스코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느낌이 좋았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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