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최고의 순간, 피어 39
투베드 룸으로 옮긴 뒤, 우리의 발걸음은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제자리를 찾는 순간, 마음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이다. 오후 햇살이 괜히 더 반짝이는 것 같아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케이블카 반환점으로 향했다. Powell/Mason Cable Car Turnaround. 손으로 직접 케이블카를 밀어 돌리는,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 꼭 보고 싶어지는 장면이 있는 곳이었다.
숙소에서 걸어서 20분 남짓. 이 숙소가 좋은 건, 어디로든 걸어서 닿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있는 쪽은 시내보다 조금 더 한산했고, 그 덕에 강하게 긴장하지 않아도 됐다. 목적지로 가는 길에 Francisco Park를 지나는데, 오후가 되자 공원이 갑자기 살아났다. 반려인들과 반려견들이 모여들었고, 울타리 안의 잔디는 작은 축제 같았다.
웰시코기, 골든리트리버, 처음 보는 대형견들까지—열 마리가 훌쩍 넘는 강아지들이 한데 섞여 뛰어다녔다.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리듬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넉넉해졌다. 우리도 집에서 강아지를 키운다. 그래서인지 동생은 못 참는 얼굴로 울타리 안에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손을 내밀고 “이리 와”라고 표현하는데, 그 모습이 어린애처럼 순해 보였다. 그리고 골든리트리버가 한 마리 다가왔고, 동생은 잠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웃었다. 나는 울타리 밖에서 총총, 껑충껑충 뛰는 강아지들을 바라보며 그 풍경을 오래 눈에 담았다.
케이블카 반환점에 도착하자, 마침 우리가 기대하던 장면이 펼쳐졌다. 사람들이 케이블카를 돌리고 있었다. ‘도시가 관광객을 위해 준비한 쇼’ 같으면서도, 동시에 그 도시가 오래도록 지켜온 생활의 방식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 장면을 보고서 다음 목적지로 발길을 옮겼다. Pier 39.
부두의 이름이 숫자로 불리는 방식이 뉴욕과 비슷했다. ‘피어(부두)’ 뒤에 번호가 붙는 것만으로도 길을 잃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환점에서 피어 39까지는 금방이었다. 식당가와 상점, 바닷바람… 관광지의 요소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래도 우리의 목표는 하나였다.
바다사자.
“못 보는 날도 있다”는 말을 들은 탓에 괜히 더 두근거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 있는 쪽을 발견하자마자 동생과 나는 거의 뛰다시피 다가갔다. 그리고—있었다.
부두 위에 올라와 느슨하게 누워 있는 바다사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듯한 표면의 털과 몸집, 그리고 ‘여기가 내 자리’라는 듯한 태도. 조금 더 안쪽에서는 바다사자들끼리 어웅 어웅 소리를 내며 자리싸움을 하고 있었다. 누가 올라오려 하면 누군가는 밀어내고, 밀려난 바다사자는 또 올라오려 하고.
순간, 어릴 때 동생이랑 놀면서 수영장에서 장난으로 밀어 넣던 기억이 스쳤다.
우리는 물속에서 유영하는 바다사자도 한참 바라봤다. 동물원이나 수족관이 아닌 곳에서, 자연 그대로의 바다사자를 이렇게 가까이 본 건 처음이었다. 시청각이 동시에 꽉 차올랐다. 울음소리, 물결 소리, 바다내음과 바다사자 특유의 비릿한 냄새까지.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그 풍경의 뒤에 금문교가 걸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다사자와 금문교라니. 샌프란시스코를 한 컷에 담으면 이런 모습일까 싶었다.
햇빛이 강해 오래 버티긴 어려웠지만, 우리는 충분히 보고 사진도 남겼다. 그리고 바로 옆 소품샵으로 들어갔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만큼은 기념품을 사자고 이미 합의한 상태였다. 이 도시는 우리에게 ‘낭만’에 가까웠고, 이미 추억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다사자 키링이었다. 동생과 나는 커플템처럼 하나씩 고르기로 했다. 유광과 무광, 은색과 검은색. 별거 아닌데도 우리가 고르는 시간은 진지했다. 결국 우리는 서로 다른 스타일로 하나씩 골랐다. 결제하고 가방에 달자마자 키링이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그날의 기분을 더 들뜨게 했다.
동생은 금문교가 그려진 키링을 하나 더 골랐고, 나는 계속 눈길이 가는 ‘차량 번호판 모양’의 기념품을 결국 집어 들었다. 원래 이런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샌프란시스코의 상징들이 한 장에 모여 있는 그 판이 이상하게도 끌렸다.
어느새 오후 4시.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바다를 보고 바다사자까지 봤는데 해산물을 안 먹는 건 반칙 같았다. 우리는 체인점도 고민했지만, 결국 이 도시에서 먹는 의미를 택했다. Cioppino’s. 나는 시원한 에일 한 잔을 시켰다. 동생은 콜라로 짠을 했다.
깔라마리와 치오피노 해산물 스튜가 나왔다. 토마토 베이스의 해산물탕 같은 느낌. 기대만큼 “와” 하진 않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결국 우리의 기준점은 한식의 얼큰함과 매콤함이라는 것. 그 결론이 우스워서 둘이 한 번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언덕이었다. 아침엔 낯설고 조금 무섭게 느껴졌던 길인데, 저녁이 되자 이상하게 익숙해졌다. 노을빛이 바다 반대편 건물들로 금색과 붉은색을 뿌리고 있었다. 멀리 알카트라즈 섬도 보였다. 동생이 앞서 걷고, 나는 조금 뒤에서 노을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누나 빨리 와!” 동생이 외쳤고, 나는 한 컷 더 찍고서야 발걸음을 재촉했다.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각자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를 복기하듯, 나는 가방에 달린 바다사자 키링을 흔들며 울음소리를 따라 했다. 동생은 배를 잡고 웃더니 그걸 영상으로 찍어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그 순간, ‘여행의 진짜 기념품’은 물건이 아니라 이런 장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보는 지금도 동생과 나는 키득 거리며 웃는다.
오늘은 참 재밌는 하루였다.
그리고 나는—이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