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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jebell Jun 23. 2024

사이다 복수를 꿈꾸다

한 번쯤이라도... 

상대가 누구이든지 누구나 한 번쯤 통쾌한 복수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혹은 현재도 꿈꾸고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을 늘 무시하거나 놀리던 사람들에게, 혹은 자신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크게 성공한 모습을 통해 뭔가 나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성공으로 복수하는 방법보다 직접적인 응징을 원할 수도 있다.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그 모든 복수의 종류가 총망라되고 있다. 


자신이 폭력적인 성향이 아닌, 지극히 보통의 사람이라고 해도 때로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대갚음을 해주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될 수 있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져 죄책감을 갖게 될 수도 있고 속 좁은 사람처럼 생각되어 스스로 마음이 불편해질 수도 있다. 이것은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혹은 종교의 힘에 의해 개인의 복수를 옳지 않은 것으로 교육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는 각종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고 사람들은 사이다 복수에 열광한다. 


날이 갈수록 이런 통쾌한 복수를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게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세상이 불합리하고 불공평하며 불평등한 부분이 점점 심해지고 있음을 실제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명화된 사회는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복잡해지기 마련이고 단단하게 느껴졌던 질서의 힘은 가장 약한 개인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도리어 어려워지게 되었다. 갈등의 양상 역시 여러 집단과 개인들로 복잡하게 연결되게 되면서 무엇이 옳은지 어떤 편을 들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이지 않게 됨에 따라 억울함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억울함) 사적인 개인 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소한 일들로 치부되어 속 시원한,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다른 사람들이 단죄해 주길 바라게 된다. 여러 SNS를 떠도는 각종 억울함의 사연들에는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처럼 인터넷을 떠돌며 자신을 대신해 단죄해 줄 그 누군가를 찾아 복수를 이루고픈 사람들의 바람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강하다고 하지만 복수만큼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잊지 않고 대를 이어서까지 계속 사랑이 지속되는 것을 문학작품에 있어서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복수는 사랑만큼 끈질기고도 강력한 욕구이다. 언제나 사람들은 복수에 열광해 왔다. 자신을 대신해 복수해 주는 사람들은 영웅이 되었다. 권선징악의 이야기들은 선한 사람들을 위한 복수의 결말이다. 현재,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이성적이고 좀 더 이상적인 그런 시대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다. 문명화되었다고 자부하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 역시 과거의 그들과 다를 바 없이 복수를 원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만약 원수가 명예를 훼손했다면, 복수로 그것을 복구할 수 있다... 또한 복수는 내가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거기서 비로소 합의와 조정이 의미를 가진다."

-프리드리히 니체



교묘하게 일어나고 있는, 어쩌면 대놓고 일어나고 있는 자신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그들과의 사회생활 속에서 그들아마도 내가 그들에게 복수하지 못하는, 그들을 두려워하는, 힘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까닭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생각은 불행히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복수에 있어서 아이러니한 부분은 개인들의 사적복수에 대해서는 제재를 가하는 국가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복수를 해대고 있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피해는 그대로 개인들이 보고 있음에도 중요한 것은 아마도 복수하지 않고 참는 것은 여전히 국가들 사이에서 힘이 없는 것으로 낙인찍혀 다른 세력들에게도 만만히 보여 앞으로 더 큰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힘의 관계가 개인들 간이라 해서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힘이 없어 무시당하는(정말 운이 없어 피해를 보게 된 경우에도) 이런 개인들에게도 니체가 말한 합의와 조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복수일지 용서일지, 혹은 다른 방법이 될지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렇기에 복수는 그 수위가 적당하다면 무조건 배제해야만 하는 나쁜 것만이 아닌 것이다. 상처 입은 마음과 회복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다면 혹은 자신(혹은 가족)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보여주어야만 하는 용기가 필요한 행동일 수도 있다. 


요즘처럼 꽉 막힌, 고구마 백개정도 먹은 듯한 그런 나날들 속에서 숨 막혀 죽지 않기 위해서는 시원한 사이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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