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90:1~17
시인은 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살아가는 생의 길이가 결코 길지 않음을.
세상과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는 티끌과 같은 존재였음을.
아마도 이를 깨닫기 전에는
"나는 영원하리라."라고 장담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찬양한다.
그분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알게 된 하나님은 "분노의 신"이다.
창조주가 분노하게 되면,
이 땅의 피조물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피조물의 생사고락이
모두 창조주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밝히 깨닫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하나님과 떨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 저 멀리 계신 것 같다.
"돌아오소서. 언제까지입니까?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Relent, LORD! How long will it be?
Have compassion on your servants.)"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음을
아직 시인은 알지못한다.
여전히 시인의 기도는 유아적이다.
"오, 아침에
주의 변함없는 사랑이 충만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기뻐 노래하고
일평생 기뻐하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를 힘들게 하신 날들만큼,
우리가 고통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동을 주의 종들에게 보여 주시고
주의 영광을 주의 자녀들에게 보여 주소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아름다움이
우리 위에 있게 하시고
우리 손으로 한 일을 우리에게 세워 주소서.
제발 우리 손으로 한 일을 세워 주소서."
"우리가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하나님을
피조물인 시인을 위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물론 이 고백 안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는 고백이
담겨있으리라.
호세아 선지자는 이와 다르게 고백한다.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가 찢으셨지만 우리를 고쳐 주실 것이다.
그가 때리셨지만 우리를 싸매 주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를 알기 위해 전심전력하자.
그가 오시는 것은 새벽이 오는 것처럼 분명하다.
그는 마치 비처럼, 마치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이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서 표현되어야 할 고백일텐데..
주님이 돌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야 하는데..
여전히 시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시인의 고백과 달리
하나님을 노래하리라.
하나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내가 하나님 곁을 떠났을 때에도
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
이제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움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돌아온 죄인을 품에 안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세상 사람들이 누리기를 원합니다.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하나님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