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최적의 사회문제 이해 시청각자료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괴물’을 보고 왔다. 요새 취업 준비로 꽤 불안정한 나여서 영화로 자주 도피하곤 하는데, 특히 히로카즈 감독 영화면 안 볼 수가 없지 않은가. 전작 스토커가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이번 영화는 호평 일색이라 기대를 안고 신영극장으로 향했다. 마침 개봉 날에 맞춰 포스터를 받을 수 있었다.
‘이번 포스터 진짜 잘 뽑았네.’ 좌우 대칭의 꾀죄죄한 두 아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고 배경의 소실점도 3:2 비율에 하단으로 위치해서 안정적이다. 배경은 그린에 블러. 포커스는 브라운의 아이들에게. 그리고 킬포인트는 홀로그램. 영화 포스터에 이런 터치가 자주 쓰이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그런 유니크함이 나를 매료시켜 버렸다. 사진을 취미로 가지고 있거나 영화를 자주 본 사람들이라면 두 인물을 중앙에 두고 좌우 대칭시키는 구도는 꽤 익숙하기에 쉬운 디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흔한 구도를 가져가면서도 유니크함을 지닌다는 것은 꽤 어려운 법. 계속 말하지만 터치, 이 터치가 예술이다. 김수영 시인의 책을 읽고 나서 형식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나는 이런 터치가 내용인지 형식인지 영화 시작 전까지 고민했다.
형식. 형식 얘기가 나왔으니 영화의 형식으로 말문을 열어보자. 이번 영화는 형식으로서 많은 유사성을 띠고 있다. 세 인물의 관점을 순차적으로 나열한다는 점에서 ‘라쇼몽’을 떠올리게 하고. 교차 된 플롯의 활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극의 후반부에 반전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놀란의 영화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의 영화 ‘메멘토’나 ‘테넷’ 등이 말이다. 하지만 각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유사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놀란의 영화가 가지는 매력으로는 긴장감을 꼽을 수 있다.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그 긴장감. 어떤 추리 소설보다 박진감 넘치는 경험이었던 ‘테넷’이 그 예시다. 이런 불친절함이 놀란 감독의 매력이다. 그럼 히로카즈의 매력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영화가 무척 친절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친절함이란 영화의 메세지나 내포하고 있는 의도 및 감성과 극의 흐름 등등을 관람자가 혼란 없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관람자의 피로도란 찾을 수 없는 그 온전함이 매력이다. 그 특유의 친절함을 무기로 관람자의 감성을 예리하게 꿰뚫고 우리의 눈물샘을 비트는 그의 방식은 항상 알고서도 당하고 또 당하게 된다. 또 당하게 되면 그 기억은 무척 오래가고, 울림은 그보다 더더욱 오래간다. 이런 그의 특징 덕분에 관객은 영화적 경험을 방해 없이 온전하게 느낄 수 있고 이는 대중성이 탄탄하다는 의미가 된다.
나는 이런 그의 장점과 각본의 합이 최고조로 잘 맞은 영화가 이번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대중들에게 널리 퍼질 수 있는 데다가 시의성 있는 주제가 깔리면 그것이 실천 예술이 아니면 무엇일까 알 수 없으며, 그런 의미로 나는 이번 영화가 굉장히 정치적(오웰)이라고 극찬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현재 한국에서도 뜨거운 교권 추락과 악성 학부모에 관한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일본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일본에서는 아이를 과잉보호하거나 비상식적인 민원을 제기하여 피해를 주는 학부모를 ‘괴물 학부모’라고 칭하면서 이 ‘괴물’들에 등장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사회 속 이런 ‘괴물’의 정체를 특정 지어 매우 정확하게 밝힌다.
작중 ‘사오리’의 관점에서 처음 이야기가 전개될 때 관객은 아이의 이상행동을 같이 목격한다. 이가 점점 도를 넘어서자 사오리는 아들 ‘미나토’를 다그치며 추궁하다 담임선생인 ‘호리 선생’의 이름을 듣게 된다. 학교로 찾아가 진상규명을 원했지만, 교원들 전체의 태도는 비인간적이며 냉담하다. 특히 주동자인 호리 선생은 무엇인가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때까지의 모습으로 관객은 학교 교원들을 ‘괴물’로 몰게 된다.
하지만 이후 담임 선생님의 독백에서 나온 ‘싱글맘’이라는 단어와, ‘미나토’가 ‘요리’라는 동급생을 괴롭히고 있다는 발언 이후로 관객은 사오리가 ‘괴물 학부모’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이 의심이 합리적인 것이 극의 초반부터 사오리는 어른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고 현재까지 미나토의 말중 확인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가 정말 괴물 학부모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후 사오리는 동급생 요리의 집을 찾아가 미나토는 자신의 친구라고 말하는 상처투성이의 요리를 만나게 되고, 괴물의 정체는 모호해진다.
이어서 담임 선생님 ‘호리’의 관점으로 전개되는 영화, 호리는 미나토를 괴물로 보고 있다. 자신이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힌다는 동급생의 증언과 요리를 화장실에 감금한 현장, 교실에서 미나토의 폭력성까지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폭행당했다는 미나토의 거짓 증언 때문에 교장과 다른 교원들의 압력에 못 이겨 학부모들에게 거짓 사과를 한 뒤 실직당하고, 부조리를 견딜 수 없던 호리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이마저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폭풍우가 치던 날 방 안에서 물품을 정리하던 중 요리의 장래 희망 작문을 보게 된 호리는 진실을 알게 되고, 미나토의 집에서 사오리와 함께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이후 미나토의 관점으로 모든 진실이 드러난다. 앞서 모든 기행이 요리를 가정폭력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었던 미나토의 발버둥이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 어떤 어른의 보호도 받지 못한 그들은 어른들이 없는 세계로 숨어들고 그제야 온전하게 서로의 진심을 나눴다. 사회로부터 멀어진 만큼 위험한 곳에서 그들의 존재는 위협받고, 그간 그들의 발버둥을 인지하지 못한 어른들은 항상 뒤늦게 그들을 찾아 헤맨다.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지난 어린 시절의 상처받은 자신을 떠올린다. 무늬만 어른인 자신의 결핍이 아이들을 향한 세심함으로 끝내 이어지지 못한 이 끔찍한 비극은 누구의 조명도 받지 못하고 그들만의 이야기로 남게 되고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렇게 아이들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고 그곳엔 우리도 없고 아무도 없다. 결국 괴물은 ‘모두’였으며 ‘아무도 아니었다’.
이번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이 허구 혹은 과장이라는 감상을 느끼는 이가 없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패악을 역설한다. 또 이 역설은 히로카즈가 그의 친절한 화법을 가진 영화라는 매체로 우리 사회의 아픔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끔 쉽게 이해시키고 공감하게 했다는 점에 그 어떤 정치적 제도 및 교육 혹은 시민운동보다 탁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며 이는 우리의 수치다. 지나친 냉소로 인한 연대 의식의 부재와 느슨한 안전망의 말로가 결국 자멸이라는 사실을 기어이 예술이 일깨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예술을 사랑하는 이로서 이를 기뻐해야 할지, 한 명의 사회인으로서 이에 좌절해야 할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거듭되는 비슷한 양상의 사회문제를 유별난 한 개인들이 저지르는 헤프닝 정도로밖에 해석하지 않으며 또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일말의 유사성을 두지 않기 위해서 주동자들을 괴물로 두는 우리는 과연 괴물이 아닐까. 왜 어디서도 실천은 보이지 않고 남들을 단죄하기 위해 화가 나 있을까.
인생은 하나의 농담이라고 또 아이러니한 일의 연속으로 영화 감상 이후 읽은 책은 또 칸트다. 악은 항상 선을 행하려는 사람 안에 있다. 내가 괴물이고, 우리가 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