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상업 영화의 중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주거난을 앓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대지진으로 아파트 한 채만을 남긴 재난 상황 속 인간들을 그린 영화다. 개봉 전부터 예고편만으로도 알 수 없는 수작의 향기가 느껴져 조심스럽고 옅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개봉 후 높은 평점과 호평들이 그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고 휴무인 어제(11일) 영화관으로 향했다. 금요일 저녁이어서 그런지 강릉 시내에 사람들이 꽤 많았고 영화관에도 사람들이 꽤 차 있었다. 우측에선 맥주 캔을 따는 소리가 들렸고 뒷자리 연인들도 팝콘을 먹는 소리를 내었다. 새삼 영화관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이 불편하면서도 신기하고 어색하였다. 원래 영화관에는 사람이 많았고, 또 많아야 하는데도, 강릉 CGV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출근길 버스를 혼자 전세 낸 것처럼 서울에선 누릴 수 없는 호사의 개념으로 강릉살이의 요상한 특혜였기에 가져서는 안 될 약간의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영화는 다행히도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근래 한국 영화 중에서 헌트 격으로 만족스러웠다. 특히 줄곧 재난영화 장르의 한국 영화들이 –물론 몇몇을 제외하고- 축적시킨 피로감과 실망감을 허물 수 있는 이러한 수작의 탄생이 내게 얼마나 기쁜지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 나서 이틀의 휴무 마지막 날 카페에서 이런 글을 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도구의 적절한 사용’으로 ‘내용의 변화’를 이끌어낸 작품이다. 여기서 ‘도구’란 재난영화의 장르적 요소로 활용되는 가족주의와 한국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인 신파 그리고 배경이 되는 현시대 대한민국 서울의 시의성과 특징이다. 영화는 이 세 가지를 활용해 내용의 변화를 일으켜 상업 영화로서의 기본을 지키면서도 작품성 또한 놓치지 않은 대중성과 작품성의 좋은 배합의 예시라고 생각한다.(이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박찬욱 감독과 같이 일을 하면서 받은 영향이 좋게 작용한 것 같다. 사람은 역시 배워야 한다. 겸손하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란 역시 ‘형식과 내용’이 동시에 변주되는 진보인데 이는 창자가 창작하는 도중에는 알 수 없기에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영화를 보고 나면 이건 별로네, 저건 좋네 하면서 평가하기는 쉽더라도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창작자가 캐치하기란 어려울 것이란 말이다. 삶도 그렇듯이 우리는 삶이 흘러갈 때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 흘러간 뒤 점으로만 남게 되면 그 점을 이어놓은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접근과 시도사 기본을 저해하기도 하며 오히려 너무 변주가 없어 표면적이고 상투적인 카피를 야기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창작자는 항시 자기 작품에 대해서 믿음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믿고 있는 순간까지도 말이다. 그렇기에 이번 영화의 성공이란 좋은 영화의 또 다른 예시로서 우리에게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혹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려줄 한국 상업 영화여서 참으로 기특하고 고마운 작품이다.
먼저 영화의 좋은 점을 나열하자면 첫 번째로 음악에 있다. 좋은 영화는 좋은 음악을 남기고 그 음악은 언제나 영화를 불러온다. 쉽게 말해 주제가 따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윤수일의 아파트. 나는 이 곡이 이렇게 무섭게 들린 적이 없다. 나이와 맞지 않는다며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본인은 이 곡을 노래방에서 꽤 애창했다. 그런 윤수일의 아파트가 김영탁(이병헌)의 살인 장면 플래시 백 다음으로 생존을 위해 살인을 정당화한 기존 사회의 도덕 윤리가 비틀어지고 도덕적 딜레마와 논쟁으로 가득 찬 집단의 축하 파티 속에서 후렴이 흘러나오니, 일상적이며 심지어 이제는 전원적인 흥이 나는 모습 속에서 “아무도 없는 너의 아파트”라는 이 가사가 김영탁의 형용할 수 없는 파괴적이며 광적인 눈빛을 직면하며 들려올 때의 충격과 공포는 이로 말할 수 없이 영화적인 경험이었다. 마치 관객에게 “너의 아파트가 우리처럼 아무도 없는 곳으로 변하면 넌 어떻겠냐”라고 관객에게 묻는 것 같았다. 그런 눈빛이 확실했다. 그런 맥락으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제가는 아파트가 확실하다. 좋은 영화의 공통적 특징인 기존 음악의 재해석 및 활용을 영화가 너무도 훌륭하게 잘 이루어냈다. 편곡된 엔딩곡이 이를 확실시한다.
또한 이런 주제가로서의 음악 활용 말고도 영화가 가진 음악적 활용도는 초반에 빛을 발한다. 봄의 소리 왈츠가 나오면서 제3의 벽을 넘을 듯 말 듯 관객을 바라보며 관객에게 입주 설명회를 하는 연출 또한 초반 분위기를 너무 무겁지 않고 빠른 전개로서 이끌어 가는 것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와 더불어 Home! sweet home! 의 성가대 버전도 취향에 맞았고 이러한 클래식 음악의 활용이 내 취향에는 맞았으나 대중적인 접근으로 윤수일 아파트의 멜로디 편곡 버전이 초반에 흘러나왔어도 좋았겠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혹은 더 클래식하게 바흐의 음악도 좋다.
두 번째로는 연출이다. 빠른 전개가 매력이다. 관객은 원활한 초반 몰입과 가스 폭발 이후 김영탁의 등장부터 몰입도가 극명하게 올라간다. 주민의 구심점임과 동시에 분열점이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는 관객이 보기엔 대지진이 아닌 진짜 문제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의 등장이 꽤나 극적이고 장엄한데 코믹해서 다양한 감정이 들게 할 것이다. 이후 앞서 언급한 주민 설명회 장면이나 주민 대표 회의, 외부인 퇴거 시 공성전, 엄태구 무리를 내려다보는 사람 잡아먹는 아파트 수색대, 바둑알 질식 살인, 스테인드 글라스, 쓰러진 아파트의 높아진 층고 등등 매력적이고 기억에 남을만한 연출들이 많이 돋보였다. 또한 로비에서 손전등을 도구로 두 남자의 실루엣을 표현하거나 다용도실에서의 조그만 창문을 통해 명암의 대비를 줌과 같이 빛을 활용하여 상황의 긴장감과 인물들 간의 힘과 계급의 차이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빛의 서포팅도 좋은 감상 포인트다. CG 또한 제작비의 관계없이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 개인적으로 없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구구절절 긴말 안 하겠다. 설명이 필요할까.
하나 논쟁의 소지가 있다면 영화 시작 후 부부의 모습이다. 너무도 현실적인 아파트 안방 배경과 이미 얼굴과 손에 상처가 가득한 체 외출복 차림으로 둘이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 어색하며 이질적이다. 김민성(박서준)이 침대에서 일어나 지진을 창밖으로 바라보기에 그들이 재난 직후의 상황인 것을 암시하는 것인데, 지진은 김민성의 기상으로 시작됨에 약간의 오류 혹은 보일러 고장으로 집에서 외투를 입고 있는 부부라는 해석으로 이는 연출적 실수 혹은 아주 정교한 연출 디테일이라는 논의가 필요한 재밌는 요소가 있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감정의 깊이다. 감정의 깊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영화 조커를 예로 들자면 우리는 러닝 타임 내내 주인공인 아서 플랙의 기구하면서도 소외당하는 삶에 대한 외로움과 분노에 공감하며 관찰하여 종국엔 파괴적이고 광적인 조커의 탄생에 전율하면서 참을 수 없는 공포감을 느끼는 처절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 또한 극명한 영화적 경험이다. 이와 같은 깊은 감정을 느끼게 해 줄 수 없는 것이 이 영화에 큰 아쉬움이다. 물론 영화가 울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별 인물들 간에 아픔이 덜 조명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민성이 총을 영탁에게 겨누며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에서, 부녀회장 아들의 죽음에서, 주민들의 차별로 침략을 계획한 주민 아저씨에게서도 옅은 감정의 아쉬움이 묻어난다. 특히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전체적으로 평면적인 색채를 띠지도 않으며, 오히려 이들의 아이러니가 전체적인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비추고 있다는 점이 더욱이 아쉬움의 무게를 더한다. 여기서 ‘아이러니’란 내 집 마련을 위한 공무원 청년 부부의 무리한 대출, 육교 하나를 건너기 위한 20년의 피 같은 세월, 아파트에서 30년 이상을 산 노부부, 급매 사기, 군 면제의 사구체신염이다. 사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원작 배경의 이야기를 각색하며 영화화할 때 자주 일어나기 마련이다. 인물들은 다양한데 러닝타임은 한정적이기에 자주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이해 가능한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작품적으로 이 영화가 가지는 의의를 생각해 보았을 때만 해도 관객들이 더욱이 자신의 상황과 맞는 인물에 이입되기 위해서는 조연이라도 그들의 감정이 더욱 잘 비추어지는 시퀀스들이 많이 함유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거론해 볼 인물은 명화(박보영)다. 명화를 보자면 시카리오의 케이트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 존엄을 중시하는 도덕 중추의 역할. 특히 영탁 옆에서 타락하는 민성을 구출하고 영탁을 제거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케이트에서 능동적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인물임과 동시에 영화의 결말을 책임지는 진보적이며 중추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인물이 초중반에서의 존재감 없이 부부로서 영탁과 함께 등장해 영탁의 타락을 걱정하고 생존을 위한 살인을 일삼는 주민들을 향해 걱정과 불안만을 가진 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인 치료만을 했다. 이에 한계를 느끼고 생명을 저버릴 수 없어 직접 행동 취했고 이가 영탁에게 발각돼 생명을 잃었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영탁에 대한 분노나 민성과의 갈등 혹은 자신의 무력에 대한 책망 따위를 비추는 장면이 너무도 미미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말에서 새로운 무리를 만나 아파트 사람들이 정말로 사람들을 잡아먹는 나쁜 사람들이냐는 질문에 “아니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라고 하며 생존의 위협 속 존엄과 도덕을 벗어던졌던 아파트 사람들에 대한 악마화를 일축하며 악의 평범성을 상징하는 대사를 내뱉는 주체가 명화이기 때문에 명화라는 존재는 둘 중 하나의 포지션이 선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는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끝까지 선을 추구하고 영화가 주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의 포지션이다. 우리 사회의 아파트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들을 포함한 다른 문제들이 생존을 위해 이기적인 명분을 내세우면서 서로를 배척하고 혐오하고 비인간화하는 점에서 영화와 현실의 문제는 같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취할 방향 및 어떠한 지향점 따위를 내포하는 메타포적인 인물. 혹은 명화라는 인물도 사건에 휘말려 선을 발휘하지 못하고 대재난 앞에서 공포심에 떨며 도덕보다 자신의 생존을 먼저 생각하는 주민들과 같이 평범한 인간들처럼 그저 무력한 존재라는 포지션이다. 그렇기에 명화의 생존은 선의 승리도 아니고 그저 우연. 결말 무리들도 그저 우연으로 생존한 것이며 우리 사회의 암담한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뿐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 중 무엇이 자신의 해석 혹은 감독의 의견 및 작품의 의도인지 알 수는 없으나 개인적으로 두 선택지 모두 다 문제와 아쉬움이 존재한다. 첫 번째 포지션에서는 앞서 언급한 문제로 명화의 캐릭터가 조금 더 입체적이고 깊지 못하기에 무게와 울림이 적어졌다. 주민들을 향해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한 적도, 문혜원(박지후)의 도움 없이는 영탁을 제거할 수도 없었던 존재가 내적인 동기 없이 영탁과의 충돌이라는 외적인 사건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명화가 그럴만한 존재인가의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명화가 주민들보다 미세하게나 우월한 선일 수 있나?
두 번째 포지션이 선택되었을 때의 문제와 아쉬움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면 사실 본인이 생각하기엔 문제의 소지가 더욱 크다고 생각된다. 이 영화가 만약 슬픔의 삼각형처럼 블랙코미디를 지향한다던가 병폐를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라면 이 영화의 결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결말 속 명화가 인간으로부터 받는 구원과 평화로운 공동체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하는 결말이 확실하게 긍정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가 주민들과 반대된 행보를 보였던 명화를 긍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 인물을 긍정하게 되는데, 이는 앞선 전제와 상충하며 우연의 연속이 부정당하고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저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작품적으로 플러스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혹여 결말이 명화라는 인물의 가치관과 행동을 긍정하지 않고 우연성의 의거한 생존이라 하더라도 앞서 말했듯 명화라는 인물의 조명이 부족함과 동시에 심지어는 본 작품 속 형식의 부동이 전혀 전략적이지 않게 된다. 명화라는 인물을 통해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는 첫 번째 포지션의 경우 대중성을 기대해 긍정의 결말로 끝나는 것에 비판의 여지를 둘 수 없지만 –아쉬움은 존재할 수 있다.- 두 번째 포지션의 명화는 영화의 어떠한 지향점을 들쳐 메고 영화의 끝을 향해 걸어가선 안 되는 것인데, 만약 명화의 짐이 있다면 이는 각본적 실수라고 간주할 수 있으며 짐이 없는 경우에는 더욱이 두렵게도 감독이 모든 것을 보여주려다 폭풍우 같은 염려로 인해 안정적인 결말이라는 옷가지를 주워 입은 것이 된다. 더욱이 아니길 바라는 가정이다. 이러한 나의 의견이 과도하게 보일 수 있으나 나름의 합리적 추론이 존재한다. 나는 이 영화와 설국 열차와의 유사성을 떨쳐낼 수가 없다. 결이 같은 영화는 절대 아니지만 재난 상황 속 한정된 공간 안에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몸부림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조심스레 감독이 설국 열차와 같은 엔딩을 기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논외로 부녀회장이 설국 열차 속 틸다 스윈튼이 맡은 메이슨과 상당이 유사하다. 아마 래퍼런스로 삼지 않았을까 하는 항상 조심스러운 접근이다.)
정리하며 덧붙이자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절실하게도 올바른 한국적 재난영화이다. 한국 재난영화는 소재만 달라질 뿐 변화가 없는 서사와 작위적인 연출 그리고 지나친 신파로 피로감이 누적되었지만, 신파를 인간의 이기심과 이면을 들추는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한국 영화의 문제가 신파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오히려 무기로 사용하는 혁신적인 영화다. 개인적으로 상업 영화의 정도나 예술 영화의 정도 따위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개성과 진보만이 있다면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더라도 작품성이 충분히 확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로 이러한 변화를 이루어준 이번 영화가 한국 상업 영화의 작품성을 한껏 끌어올려주었음에 더욱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번 영화는 의도치 않게 많은 사람이 있는 극장에서 관람했다. 영화관에서 불특정 다수와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이 어색할 만큼 나는 그 의미와 재미를 잊고 있었다. 상영 내내 허벅지를 움켜쥐며 본 이 영화를 주위에 추천할 때엔 난 항상 혼자 보지 말고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같이 관람하라고 전한다. 강렬한 시의성을 가지고 있는 영화를 같이 관람할 때의 감정이란 굉장히 오묘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이야기가 다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내 앞에 펼쳐진 수많은 뒤통수들과 나와의 이야기, 허구도 아닌 실제라는 점이 가장 큰 아이러니와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