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의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허무의 바벨탑'
격변의 시대 속 광란의 할리우드가 쌓아 올린 허무의 바벨탑, 영화 ‘바빌론’. 도덕 윤리와 인간 존엄의 가치 따위는 철저히 우스갯거리가 되고, 오로지 영화 제작에만 몰두해 있는 그곳. 어느 신생국가의 건국 초창기와 같이 피바람이 부는듯한 1920년대 할리우드의 모습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독자적인 하나의 생태계이자,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피가 들끓는 맹수와도 같았으며, 사람들의 동경과 찬사를 받으며 미친 듯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바벨탑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바벨탑 속에는 ‘신’과 어깨를 나란히 서려했으나 ‘신의 높이’에서 끌어내려져도 온전할 수 없는, 역사 속에 수많은 ‘잭 콘래드’, ‘넬리 라로이’, ‘매니 토레스’와 같은 ‘인간’들의 추락한 사체가 쌓여있었고, 그 시절 할리우드는 그런 인간들로 쌓인 ‘허무의 바벨탑’이었다.
이런 바빌론을 감상하러 영화관에 가는 것은, 특히 서울도 아닌 강릉이라는 지방 소도시에 사는 23살 한국인 청년이 –공통점이나 연관성을 찾아보기 힘든- 1920년대 할리우드의 이야기를 보러 혼자 사는 집에서 발걸음을 뗀다는 것은, 둘 사이의 어떤 강력한 ‘인력’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 인력은 광속에 비하면 미천하나 청년에게 3시간의 시간 여행은 선사하기엔 충분하다. 그렇게 청년은 바빌론을 통해 1920년대의 할리우드로 떠난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 후 청년은 언젠가 다시 인력에 이끌려 영화관으로 향한다. 이것이 이 인력의 작동 방식이며 작동 조건은 철저한 감상 그 자체에 있다. 이런 알 수 없는 인력의 정체는 아마도 바빌론의 말미에서 우리가 모두 보았듯이 시대를 초월하여 불멸하고 또 영생하는 것이며, 할리우드 광인들이 그 광란의 정글 속에서 처음 가슴에 품은 순수한 사랑임과 동시에, 영화관 존재의 어떤 단순한 이유, 그 이유, 그 인력, 즉 ‘FILM’ 일 것이다.
그렇다면 FLIM의 인력으로 영화관에 간 청년은 왜 바빌론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뒤집어 보면, 이 영화를 사랑할 이유는 무엇이 있나. 그것은 아마도 감독이 그려낸 1920년대 할리우드의 매혹적인 세계 때문일 것이다. 초반부터 벌어지는 꼬라지를 보라. 이 얼마나 난잡한가. 필자는 영화를 감상할 때 잘 먹거나 마시지 않는다. 이번에는 오랜만에 팝콘을 챙겨갔는데, 영화 시작부터 팝콘을 먹던 손을 멈추게 됐다. (무슨 장면인지 알 것이라 생각한다.) 오프닝은 영화 몰입의 시작과 영화의 캐릭터 설명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그런 부분에서 바빌론은 완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오프닝부터 알 수 있듯이 바빌론이 그리는 할리우드는 직설적이며 꾸밈이 없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오히려 꾸민 이야기 같지만, 실제 인물과 배경 모티브가 있다는 점이 오히려 꾸민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말 다른 의미로 동화 같다. 관객은 그 매혹적인 세계에 빠져들고 여러 인물에 몰입된다. 먼저 관객은 잭 콘래드의 당대 최전성기 스타로서의 오만하고 화려한 모습과 넬리와 매니의 할리우드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함께 시작되는 그들만의 할리우드 입성을 보며 그들에게 몰입되었다가, 그의 시대가 끝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분노에 차 있던 잭이 엘리노어의 이야기를 듣고 겸허한 태도로 바뀌며 위엄 있게 살아온 삶의 끝이 결국 허무로 가득 찼기에 그가 느낄 고독과 공포를 함께 곱씹고, 그의 마지막 파티 속 그가 죽음으로 걸어가는 길을 함께 걷다가 몇 발자국 뒤에서 문이 덜 닫힌 그의 방 문 틈 사이로 숨죽여 지켜보다 기어이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끝내 눈물지으며, 넬리의 매니의 공존할 수 없는 부조화와 그 속에서 잔존하는 이룰 수 없는 그들만의 사랑을 느끼며 불안해하다가, 결국 무대의 불이 꺼지고 사라지는 배우 그 자체의 삶을 이룬 넬리를 그 전의 실수들을 미워할 수도 없이 사랑스럽게 생각하며, 정상에서의 추락 후 도피한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렸음에도 할리우드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던 매니의 영화관 옆자리에 앉아 말없이 같이 영화를 보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몰입한 자신을 발견한다. 또한 기회를 얻고 승승장구하는 ‘시드니 팔머’가 마주한 치욕에 같이 불편해하며 그의 소신 있는 결정에 고개를 자신도 모르게 끄덕이면서, 영화 말미에서 그동안 화면 안에서 큰 활약을 하지 않았음에 그 인물의 오랜 존립이 설명되는 ‘엘리노어 세인트 존’이 나지막이 뱉는 인생의 허무 앞에 쓰러지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감정의 요동 속에서 자연스레 마음에는 영화에 냄새가 베인다. 그 냄새는 빠지지 않는다. 어떤 세탁으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저 다른 냄새만 덮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몰입의 이유 중 또 하나는 배역 그 자체의 연기에 있다. 배우의 인상이 배역보다 짙게 남는다면 이는 배역을 연기했다기보단, 그냥 그 배우 자체가 나온 것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침착맨 방송’에 나온 ‘남도형’ 성우가 ‘성우를 하면서 캐릭터보다 성우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 필자는 연기 또한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예시로 나는 ‘범죄 도시’ 또한 재밌게 보았지만, 그 이후 쏟아진 ‘마동석 영화들’에서 마동석이 맡은 배역들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이는 ‘바스터즈’의 ‘한스 대령’, ‘다크 나이트’의 ‘조커’를 맡은 ‘크리스토프 왈츠’,‘히스 레저’와 같은 배우가 연기로 재조명되는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다. 배우가 한 캐릭터로 고착되는 것에는 일종의 경계가 따라야 하겠지만, 두 비교군은 직관적으로도 서로 다른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마고 로비와 브래드 피트의 연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마고 로비는 ‘수워사이드 스쿼드’에서 ‘할리퀸’을, 브래드 피트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클리프 부스’와 같이 바빌론과 캐릭터가 비슷한 배역을 연기한 바 있지만, 이번 작품에서 둘의 향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전부터 느낀 바로, 마고 로비는 배우로서 천운과도 같은 눈을 가졌고, 브레드 피트는 이 영화를 통해 필자를 비롯한 많은 시네필들이 마음속에 품고 애정하는 배우로서 또다시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매니를 연기한 ‘디에고 칼바’의 연기와 ‘시드니 팔머’를 연기한 ‘조반 아데포’ 역시 다른 작품 출연과 같은 비교군이 없어 자세한 평에 있어 아쉬움이 있지만, 오히려 할리우드 첫 데뷔의 뉴 페이스들이 선보이는 허물없는 연기가 작품 속에서 매니와 시드니가 정직하게 존재하였음에 의의가 깊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사랑할 이유는 그저 훌륭한 배우들과 직설적이고 꾸밈없는 매혹적인 세계 때문인 걸까. 오히려 카메라가 훑고 지나가는 바빌론의 할리우드는 술과 마약, 매춘, 살인과 시체 유기의 비상식 소굴이다. 매혹적이라기엔 평소라면 기겁하고 달아나야 할 충격적인 광경이지만,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싫어하는 이 없이 그 파티를 즐기고 있는데, 이는 보는 관객 또한 마찬가지다. 관객은 이미 그 광란의 시대 속 함께하는 자신에게 의문을 품지 못하고, 그 광란을 즐기고 있는 이유, 뒤집어 말하면 그 광란에서 벗어날 이유 또한 찾지 못한다. 그저 그 속에서 그들과 같이 움직인다. 그들과 같이 춤을 추고 그들을 느낀다. 필자는 그것이 술과 마약보다 더 큰 쾌락을 불러오는 광기인 ‘음악’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 음악 때문에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영화 음악의 세계는 너무도 매력적이다. 영화 음악은 작품 속에서 지각의 순간 없이 흘러나와 –특히 영화를 잘 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더욱더- 관객을 사로잡기도 하며, 혹은 영화의 순간에 적절한 음악이 나옴에 경이를 금치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음악이 유명한 영화의 대표적인 예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나오는 ‘한강 찬가’나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서 나오는 ‘Cries of Whispers’는 한국인이라면 음악의 제목은 몰라도 누구나 듣게 된다면 흥얼거릴 수 있을 노래다.
영화를 사랑함에 또 다른 이유가 되는 이 영화 음악. 바빌론의 감독 ‘데미언 샤젤’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위플래쉬’, ‘라라 랜드’와 같이 음악이 돋보이는 영화가 있다. 그간 보여왔던 데미언 샤젤 감독의 영화와 이번 영화 바빌론에서의 음악이 엄청난 이유는, 음악 감독 “저스틴 허위츠”가 “데미언 샤젤” 감독의 친구이자 하버드 재학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임과 동시에 감독 자신도 악기 연주 경험이 있고,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로 시대 고증을 많이 참고하여 다양한 장르를 함께 융합하여 전례 없는 음악을 만들고자 노력했기에 있다.
이렇게 바빌론과 같이 영화 음악이 뛰어난 영화들은 영화 OST 앨범 감상이 더 깊은 사랑으로 발전하는 길이 된다. 아무 소음도 없는 곳에서 혹은 사람이 너무 많은 광장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사랑하는 영화의 OST를 들으면 당신은 다시 그 영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번 바빌론 앨범에서의 첫 트랙 ‘Welcome’의 펑키 재즈 밴드 사운드가 당신을 다시 광란의 할리우드로 회귀시키고, 그 후 ‘Manny and Nellie’s Theme’가 들려주는 이 아름다운 선율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귀를 기울여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매니와 넬리의 첫 만남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왜냐면 ‘Coke Room’과 같이 멜로디의 변주는 영화 내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Coke Room이 끝난 후 잠깐의 정적. 1초의 찰나의 순간 후 들리는 목소리는 그녀, 레이디 페이 주다. 당신은 소름이 돋는다, 그녀다. 그렇게 그녀의 공연이 다시 펼쳐진다.
이후 ‘Voodoo Mama’의 엄청난 하모니에 소름이 돋으면서 당신은 ‘Gold Coast Rhythm (Wallach party)’를 듣고 누군가가 떠오른다, 입으론 이미 음을 흥얼거리면서.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즈음 흘러나오는 또 다른 변주 ‘Ain’t Life Grand’. 당신은 삶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미 그렇지만 말이다.) ‘Kinescpoe’의 곡들을 지나곤 ‘Night on Bald Moutin’와 ‘Gold Coast Sunset’의 심포니를 만난다. 그 후 ‘New york’과 ‘See You Back in LA’를 마주하곤 떠오르지 않던 그의 이름을, ‘잭 콘레드’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를 추억하는 감상을 깨는 ‘I Want Man’의 코믹하고 중독성 넘치는 재해석이 가미된 곡이 당신을 웃게 한다. ‘Sining in the Rain’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꼴사납게 춤추던 잭을 생각한다. 이후 많은 곡들을 지나 ‘Jack’s Party Band’의 전조와 함께 ‘Gold Coast Rhythm (Jack’s Party)’에 결국은 당도한다. ‘Gold Coast Rhythm (Jack’s Party)’이 흐르는 공간에서 당신이 홀로 있다면-혹은 홀로 있지 않다고 해도-그의 마지막을 떠올릴 수 있다. 트럼펫과 피아노가 주를 이루는 이 곡에서 당신은 그의 죽음을 떠올릴 수 있다. 그의 허무 속 공포를, 고독 속 실의와 침묵 속 의열한 결단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은 ‘잭 콘레드’가 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죽음이 너무도 허무하고 우리의 삶조차 그러하듯이 곡의 마무리는 감정 수습의 틈도 없이 끝이 난다. 변명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미련도 남기지 않는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이는 ‘Levántete’가 증명한다. 죽음은 의외로 평범하다. 세상은 이를 신경 쓰지 않고 돌아간다. 파티 또한 계속된다, 삶이 그러하듯이.
조금은 편향적으로 윗글에서 잭 콘레드의 언급이 많은 것은, 필히 매니와 넬리 또한 영화의 중요한 축이지만, 내겐 잭 콘레드의 그 ‘태도’가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글에서 언급은 적었으나 필자는 ‘엘리노어 세인트 존’ 또한 좋아한다. 뜨겁게 사랑하고 동경하는 것(엘리노어의 경우 문학)이 있었으나 현실과의 괴리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좌절했음에도 생존 의지는 잃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그 모습이 좋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의 아류에 불과해 큰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객관적이면서 현실적인 통찰력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 아픔도 있고 수치도 있지만, 그 속에서도 잃지 않는 것이 있되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아 자랑할 수 없는 사람. 대체로 내가 공감하고 흥미롭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기에 곁에 두고 같이 카페에 가고 싶은 사람. 그렇다고 그녀가 사랑스럽다고 묻냐면, 그렇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너무도 매력적이다. 당신이 얼마나 이곳을 위해 일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고, 그저 당신의 시대가 끝났을 뿐이라는, 그러니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 말. 그 속에서 오래 살아가는 것은 빛을 잃은 나와 같은 두더지지 당신과 같은 장미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도 담담히 말해주었다.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은 겸허 그 자체이다. 인정하고 떠나야 하고, 잭은 그렇게 떠났다. 그렇기에 그 잭의 태도 또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의 허무에 나름의 방식대로 직면하는 그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필히 공허하고 허무하다. ‘인생’이라는 것은 일회적 사용 성격이 강한 하나의 리셋 버튼이 없는 여정으로서 돌이킬 수 없고 죽음을 향하여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一生 ’이며, 삶의 주체인 우리 인간은 항시 불안하며 고통 속에 머물러 있다. 이런 삶의 유한함과 허무가 있기에 인간의 살인, 탐욕, 나태, 시기, 도박, 폭음, 흡연, 사랑, 우정, 웃음, 울음, 모험, 정복, 전쟁, 교육, 학습, 예배, 기도 등과 같이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이성적이며 감정적이고 광적인 행동들의 이유가 ‘인간다움’ 그 자체로 설명된다. 그렇기에 이 점에서 감독은 인간이 아닌 영화를, 즉 FILM을 바빌론의 주제로 삼았다. 바빌론의 시대 배경 속 인물들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오히려 직설적이고 가감 없는 솔직하고 독창적인 감독만의 할리우드를 묘사하면서 그저 찬란한 만큼 공허했던 그곳을 감독은 영화라는 예술로서 표현한 것이다.
“바빌론의 별점은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따라 달렸다.”라는 감상평이 있을 정도로 바빌론은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사랑을 다룬다. 특히 바빌론의 결말 부분에 낯설지 않은 장면들이 있다. 시네필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영화사적으로 기념비적인 명작들의 오버랩으로서, 이는 영화 산업의 진보를 보여주는 함의임과 동시에 잭과 매니, 넬리와 같은 이들에 대한 모호한 존경의 표시이자 인간의 영생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신이 되려고 한 인간의 육신은 죽음 이후 바벨탑 바닥에 쌓여있다. 하지만 그들은 지켜보는 관객이 있고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몇 세기가 지났더라도 다시금 새로운 관객의 가슴속에서 ‘영화배우 잭 콘레드’, ‘영화배우 넬리 나로이’, ‘영화감독 매니 토레스’로 기억되고 살아있을 수 있음에 영화로 영생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데미언 샤젤 감독’의 ‘영화 바빌론’은 허무한 인간의 삶이 신과 같은 영생을 얻으며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영화라는 예술을 주제로, 그저 영화 속에 존재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인 ‘인간’의 ‘허무적 삶’을 오케스트라 속 바이올린과 같이 ‘도구적’으로 사용하여 ‘할리우드 속 멋들어졌던 인간’들이 아닌 ‘할리우드의 영화들에 대한 찬미’라는 것을 공고히 하는 너무나도 잘 조율된 ‘영화 찬송곡’이라는 것이 바빌론에 대한 나의 감상이다.
끝으로 고전 명작들을 감상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더 이상 이런 명작들은 나오지 못하겠지”였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을 철저히 붕괴시키는 영화들이 최근 들어 여러 있었다. ‘헤어질 결심’,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 그리고 이번 영화 ‘바빌론’. 이런 사실들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감상할 수 있음 그 자체에 순수한 사랑을 느끼며 삶에 감사하게 된다. 공허하고 허무뿐인 나의 삶이지만 이런 작품들에 영감을 받을 때마다 살아감의 가치를 느끼곤 한다. 이것이 청년이 느낀 인력이자 가슴에 품은 순수한 사랑이며 바빌론이 의도했던 바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나는 영화에 완전히 매혹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청년은 벌써 ‘타르’를 예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