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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실 때 내 핸드폰은 누가 좀 숨겨주오

술은 기억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줄 알았는데

by 루시아

인간이라면 보통 술에 관한 부끄러운 기억을 한 두 개쯤은 가지고것 같다. 안 그러신 분은 뤼스펙!

술 한 잔쯤은 약주라고 말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느 정도의 절제력을 보유했길래 술을 한 잔만 마시고 멈출 수가 있는 걸까. 절제력이 상당하니 남들 앞에서 추태 부린 적도 없으려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설마 정말 딱 한 잔만 마시고 끝내는 건 아닐 것 같기도 하고.


몸에 좋지도 않은 술인데 도대체 이건 왜 자꾸 생각나는 걸까?


술을 마시면 Paris in the rain 이 갑자기 듣고 싶어질 정도로 감성이 멜랑꼴리 해진다.

없던 자비로움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감춰두었던 나만 알고 있던 소녀 같은 감성도 굳게 닫힌 문을 빼꼼 열고 룰루랄라 외출하듯 밖으로 나온다.


평소에는 한없이 내향적인 내가 술과 섞여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고 나면 분위기에 취해버린 나는

한없이 깔깔거리며 웃었다가

한없이 슬픔에 잠겨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가

어느새 폭 고꾸라져 잠들었다가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진상 진상


없던 애교는 또 어디서 그렇게 싹싹 긁어모아 발사를 해대는지. 난데없이 반토막난 혀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인 몹쓸 꺄꺄뿌뿌도 해보고.

정말이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나의 101가지 새로운 면모들이 방출, 그래 방출이 된다.


그럴 땐 핸드폰은 멀리에 가능한 아주 머어얼리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 못 차리고 자꾸만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사고를 치고 만다.


술 이야기만 하면 나에겐

걱정이 되는 한 사내가 있다.





그 아이는 대학 1학년 미팅으로 만나 사귀게 된 동갑내기 남자친구였는데 그 아이도 모솔(모태솔로), 나도 모솔이었다. 둘 다 초중고 학창 시절, 학생의 본분인 공부만 열심히 하느라 다른 건 쳐다도 안 본 케이스였다. 더구나 그 아이는 수도권도 아닌 경상도에서 열공하여 SKY 중 하나를 들어간 모범생이었으니 나보다 더 열심히 했겠지. 이성친구는 대학에 가야만 사귈 수 있는 줄 알았던 우리는 숙맥이었다. 그러니 대학생 새내기 신분으로 난생처음 4대 4 미팅 자리에서 얼마나 눈이 돌았을 것인가.

그야말로 환상의 나라, 미지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래서 뭐 어찌어찌 이렇게 저렇게 그 아이와 연애라는 걸 하게 되었는데 둘 다 모쏠이다 보니 뭘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이건 뭐 언제 손을 잡아야 하는 건지, 언제 뽀뽀를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있나. 뭐 어찌 되었든 누가 가르쳐 주진 않았지만 본능에 충실한 우리는 그렇게 찔끔찔끔 연애 같은 걸 조금씩 진행시키는가 싶던 중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난 그 당시 매우 유머러스한 사람을 좋아했는데 그 아이는 언제 어느 때나 항상 진지모드에다 심지어 말수도 별로 없는 경상도 사나이었다. 나는 오디오 비는 걸 심하게 못 견뎌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왠지 조용한 분위기는 만날수록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 조용함을 견디기 힘드니 어쩔 수 없이 대화는 물론 유머까지 내가 담당했다. 피곤했다. 내가 잠시 딴생각에 잠겨 말을 하지 않으면 그와는 어디를 가도 언제나 도서관 데이트를 하는 느낌이었다. 쥐 죽은 듯 조용했다는 이야기다. 보통은 남자가 능글능글 허세 가득 유머를 쏟아내면 여자는 호호호 깔깔깔 웃어 주면 되는 거 아니었나? 피곤한 게 딱 싫은 나는 지루한 것도 싫어져 결국 그 아이와 헤어짐을 선택하고 몇 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 몇몇 이성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해 본 결과 그 아이가 잊히기는커녕 자꾸만 떠올랐다. 역시 순박하고 지고지순하고 지조 있는 사람은 희귀한 만큼 내 곁에 두었어야 했구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간혹 내가 너무 마음에 드는 상대를 볼 때면 그 앞에선 얼어버린 듯 입도 뻥긋 못 하겠던데, 혹시 그 아이도 내 앞에서 너무 떨려 말을 제대로 못 한 건가 하는 짠한 마음까지 들었다.





20대 후반쯤이었나.

어느 날 난 술을 제법 마시고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 아이에게 전화를 걸고 만 것이다!

그것도 밤 11시쯤?


술에 취해서 그 아이에게 한다는 소리가


"너... 결혼했어?"


"... 응..."


헉!! 술이 화들짝 깼다. 시계를 잽싸게 봤다. 밤 11시면 아내와 함께 있을 시간인데!

혹시 벌써 둘이 잠자리에 나란히 누워있던 중인데 내가 전화를 걸어 산통 깬 거면 어쩌지?


"지금 그럼, 같이 있어?"


"...... 응..."


"(헉!!!!!!!!!!) 응, 알았어. 미안... 잘 지내."


난 황급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KakaoTalk_20230911_213844207.jpg



도대체 난 전화를 왜 한 걸까.

아... 어찌나 미안하고 창피하던지, 그날 쥐구멍을 못 찾은 게 천추의 한이다. ㅠ.ㅠ

옛날에도 과묵하더니 몇 년 만의 통화에서도 여지없이 응이라는 대답 두 번 밖에 못 듣고 끊을 전화, 어이구...


혹시 나로 인해 부부싸움을 하지는 않았는지 매우 걱정이 되었다.

그 아이의 심성으로 보아 거짓말로 얼버무리거나 아내를 불안하게 할 타입은 아니니 한 번의 해프닝으로 웃으며 슬기롭게 잘 넘겼을 것 같긴 하다만... 설마 그 일이 발목 잡혀 아직도 아내에게 잡혀 사는 건 아닌지...


정말 미스터리인 건

헤어지고 3년도 더 지났는데 당시 그 아이 전화번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던 건지가 너무 의아하다. 그것도 술에 취했으니 기억이 더욱 가물가물했을 텐데 단축키가 있어서 지정 번호를 하나 꾸욱~~ 누른 것도 아니고 011부터 시작하는 번호를 하나하나 일일이 꾹꾹 눌러 제대로 전화를 한방에 걸었다는 게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술은 기억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줄 알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다음에 내가 술을 좀 거하게 마신다 싶을 땐, 내 핸드폰은 제발~


누가 좀 숨겨주오...





*Pixabay로부터 입수한 Gerd Altmann님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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