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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터의 딸로 사는 건 피곤해

돈이 뭐길래

by 루시아


엄마와 아빠는 파이터였다.

엄마는 홍팀

아빠는 청팀



나는 여자니까 홍팀에 서고 싶었지만 언니까지 홍팀에 편을 먹으면 홍팀은 3명, 남동생이 아빠한테 가면 2명 그럼 3:2는 좀 불공평하니까 그 누구의 편을 들어버리기는 좀 애매했다. 하는 수 없이 심판 노릇을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아무리 레드카드를 높이 쳐들고,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어도 심판 나이가 너무 어려서 그런가 좀처럼 심판의 의견은 양 선수에게 먹히지 않았다. 틈만 나면 "식빵"을 외치는 우리 대한민국 배구의 자랑인 연경언니처럼 우리 엄마, 아빠는 자꾸만 연경언니의 유행어인 "식빵"을 힘주어 외칠 뿐이었다. 음... 그 당시는 연경언니가 유명해지기 전이니까 엄밀히 하자면 우리 엄마, 아빠가 식빵의 원조가 되는 건가.



한 번 파이트가 시작되면

이것 참

곤란하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하고,

지겹기도 하고,

너무 징글징글해서

자꾸만 징글벨 노래를 부르고만 싶었다.



도대체 왜 싸우는 걸까?

조용히 듣고 있자니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아빠는 아빠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한다고 했지만

월급날이 되어 봤자 스쳐 지나갈 뿐인 어림반푼어치도 안 되는 돈 때문에 매번 그 사달이 났다. 월급봉투를 먼지가 날 때까지 탈탈 털고 뒤집어 까도 생활이 될까 말까인데 꼭 그렇게 비상금을 꼬불쳐 두신다. 따로 쟁여 두시려면 걸리지나 마시지, 기어코 꼭 들키고야 만다. 남들은 해마다 월급이 오르는데 당신만 왜 혼자 동결인 거냐로 시작해서 이렇게 서로 믿음이 없어서 어찌 살겠느냐며 배신감 때문에 살 수가 있니 없니...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처음엔 약간의 불신으로 시작하였으나 절정에 치달을수록 신혼 초부터 겪은 서럽고 억울했던 시집살이며, 시누이살이의 보따리보따리 이야기보따리가 한도 끝도 없다.

처음엔 조그만 소리로 다정한 대화 중인가 싶다가도 여지없이 크레센도로 이어지는 고음행진으로 옆집에 민폐일까 싶어 나는 공부하다 말고 뛰쳐나와 아직 힘이 펄펄 남아도는 파이터들을 중재하는데 시간을 빼앗겨야만 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분명 식민지 치하의 시임에 틀림없는데

일제강점기는 구경도 못 해 본 내가 자꾸만

이 시와 애착관계를 형성하려 들었다.


오긴 오는 걸까.

봄.

늘 막막한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내 공부시간을 뺏는 것에 대해 두 분 다 미안함이라고는 단 1도 없으셨다.

다음 날 학교 시험이 있어 이 밤이 가는지 신새벽이 오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공부를 해도

"아이구우. 우리 루시아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구나."

라는 칭찬이라곤 절대 없었다.


엄마 또는 아빠는 밤 10시만 되면

딸내미가 공부를 하든가 말든가

내일이 시험이든가 말든가 상관없이 문을 벌컥 열고

"자라"

한 마디에 불을 탁~! 끄고 가셨으니까.



거북이 아니고... 자라.




나는 청개구리였다.

방 꼬락서니가 이게 뭐냐~!

하면 더욱 열심히 최선을 다해 어질렀고

머리 좀 감아라~!

그러면 나는 자연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며 물을 더욱 아꼈다.


공부보다 건강이 먼저다~ 자라~


하고 불을 끄시면 포기하는 척 눈을 감고 자는 척하다가 조용히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를 배경 삼아 몰래 불을 딸깍 켜고 다시 공부를 했다. 같은 반 친구네 집 엄마, 아빠는 제발 공부만 하라고, 공부만 하면 너 원하는 거 다 해준다고, 그도 저도 아니면 몇 날 며칠을 업고 다닐 거라는 희한한 소리까지 하셨다는데 나에겐 다른 세상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맨날 돈 돈 거리는 거 듣다가 나도 돈에 어느 정도 세뇌를 당했는지 돈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돈.

과연 우리는

돈이 없으면 돈을 안 쓰면 된다.

라는 명제가 맞을까,

돈이 없으면 돈을 못 쓴다.

라는 너무도 당연한 문장이 맞을까?




중학교 3학년이 되었던 해.

재작년 졸업한 선배언니들이 모교를 방문해 주요 과목이 아닌 수업이 "선배와의 대화"수업으로 바뀐 적이 있었다. 자신의 학교로 진학하면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며, 한마디로 자신이 다니는 고등학교 홍보가 목적인 대화였다.

한창 상업고등학교 바람이 불었었다.

전교권에서 공부 좀 한다고 하는 친구들이 당연한 수순인 줄 알았던 인문계 고등학교를 안 가고 서울여상, 동구여상 등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한 후 졸업도 하기 전 단기간에 취업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걸 보시곤 엄마, 아빠도 내심 기대를 거셨던지 "우리 딸, 상고는 어떻게 생각하니?" 하고 물으셨다.


몽골에서 홈스쿨링을 하다가 소년, 소녀티를 고스란히 지니고 무대에 올랐던 악동뮤지션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 이전엔 량현량하 형제가 있었고. 이렇게 뛰어난 자녀를 둔 부모님은 참 얼마나 뿌듯했을까. 어른도 되기 전 밥벌이를 저리 옹골차게 하는 자녀를 바라보며 참 흐뭇했겠지.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특이한 경우이며 난 그렇게 해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돌이 아니니까!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대학에 가서 불투명한 취업에 목매는 것보다 여상으로 진학하여 상고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하면 대학 등록금도 아낄 수 있고 집에 보탬이 되니 이리 보나 저리 보나 훨씬 남는 장사라 생각하셨을 테지만.



하지만 나는야 청개구리.

청개구리는 빗물에 떠내려갈 무덤을 보며 개굴개굴 울어야 진정한 청개구리지.

그런 내가 말을 잘 들을 턱이 있나.

기를 쓰고 공부했다.

그 흔한 과외도 한 번 못 받아보고,

남들 다 가는 학원도 한 번 못 가보고,

그리고

결국엔

대학에

갔다.

역시나 축하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고.



요새 들어서는 차라리 여상 졸업하여 은행원이 되는 게 더 나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요즘이긴 한데

후회한다고 뭐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니

후회는 없다. 아니 후회는 안 할 거다.




https://youtu.be/4rtpni_UHpo

김동률 "아이처럼"



왔다 갔다 아이들 픽업하면서 듣는 라디오에서 김동률의 "아이처럼"이 흘러나온다.

감미로운 목소리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다 이런 가사가 귓가에 들린다.


이렇게 나의 곁에서 웃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서
너무 좋아서 너무 벅차서
눈을 뜨면 다 사라질까



일곱 살쯤이었나.

엄마, 아빠께 어버이날 꾹꾹 눌러쓴 감사엽서글이 갑자기 떠올랐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앞으로도 우리

행복하게

벅차게 벅차게 살아요.




지금도 힘든데 뭘 더 어떻게 더 이상 벅차게 살라고

벅차게 벅차게

벅차게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집어넣어

안 그래도 육신이 힘드신 엄마, 아빠를 심적으로 고생을 시켰을까.


노래 듣다가 잠시 반성의 시간을 급하게 가져보기로 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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