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세 군데에 퍼 담고, 반찬을 세 군데에 나눠 넣고 끝에 삼지창이 달려 포크로도 쓸 수 있는 숟가락 세 개도 각각 챙겨 넣는다. 공부지옥 고등학교에 입성했다고 축하인지 위로인지 모를 인사를 받은 게 엊그제인데 나의 아침 일과는 여느 고등학생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따순 밥을 해 놓은 엄마가 날 흔들어 깨워 "학교 가야지~ 지각하겠다~"는 잔소리를 듣는 호사스러운 시절이 아니었다. 스스로 알아서 6시도 되기 전에 일어나서는 부랴부랴 언니 도시락 두 개와 내 도시락 한 개를 싸야만 하는 억척스러운 학생이었을 뿐이었다. 다행히 남동생은 학교에서 급식을 먹을 수 있었기에 도시락 네 개를 싸지 않아도 되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엄마가 많이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때였다.
야간자율학습까지 해야 하는 언니는 시간을 쪼개 써도 모자라는 고 3 신분이라 도시락을 손수 싼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동생에게 미루자니 동생은 남자이기도 했고, 자신은 급식을 먹는데 누나들을 위해 도시락을 자진해서 싸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만만한 게 둘째인 나였다. 더구나 이제 겨우 고 1이니 고 3인 언니보다 시간이 더 여유로운 건 사실이었다. 물론 고 1이면 공부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긴 하나 방향 그까짓 거 타이타닉에 방향키를 잡고 서 있는 선장도 아니고, 지나가는 개나 줘야지 방향타령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우선 먹고살아야 했고 학교에서 남들 다 먹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이 없어 쫄쫄 굶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도시락 싸는 일은 내 차지가 되어 버렸다.
아침 6시도 안 된 이른 시간에 발딱 일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내 준 숙제를 하고 준비물을 챙기고 좋아하는 책도 읽다 보면 어느새 12시가 훌쩍 지나버렸으니 아침엔 눈이 쉽게 떠지지가 않았다. 밥을 안쳐야 하고 분홍소시지에 계란물이라도 묻히다 보면 훌쩍 한 시간이 흘러 있었고, 씻고 먹고 교복 입고 학교 갈 준비까지 하자면 아침부터 100미터 달리기 10번을 나 혼자 이어달리기하는 기분이었다.
대한민국의 학교는 죄다 왜 그리 언덕배기에 올라가 있는 것일까. 여고생들의 야리야리한 다리를 진작부터 무다리로 만들어 놓은 후 위험에 닥쳤을 때 스스로를 위기에서 구해내게 하려는 이유였을까. 언덕배기 위에 있는 학교에 허겁지겁 도착하면 '오늘도 새 날이 시작되었군! 열심히 공부해 보세!' 하고 파이팅을 다지는 게 아닌 완전히 정반대였다. 지각하지 않고 제시간에 등교했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긴장은 탁 풀려버렸고 평화로운 마음에 잠이 솔솔 쏟아졌다. 1교시 까딱까딱, 2교시 나른, 얼레벌레 시간이 흐르다 고등학생이 되어 첫 중간고사를 치르고는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당시 시험을 보면 전교 1등부터 50등까지 학생 명단을 학교 복도에 대자보 붙이듯 일주일 동안 붙여 두었었다. 시험을 잘 본 학생은 공부하느라 수고 많았다며 어깨에 힘 좀 넣고 다니라는 거였고, 시험을 망친 아이들에게는 앞으로 더욱 분발하여 50등 안에 꼭 들으라는 독려였을 게다. 말이 좋아 격려였지 눈에 보이지 않는 채찍질과 같았다. 선생님은 물론, 친구들 사이에서도 "쟤는 공부 좀 하는 애, 쟤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애"라는 선입견만 차곡차곡 쌓게 할 뿐이었다.
첫 시험 나의 전교등수는 51등...
정말 아깝기 짝이 없었다. 50등까지 붙어있는 리스트에 51등은 의미가 없었다. 50등까지 검은색으로 이름을 진하게 써넣어주는데 51등은 너무 아깝다고 회색으로 끄트머리에 조그맣게 써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난 진짜 51등이었는데 자기 등수가 창피했던 아이들은 너도 나도 자기가 51등이라고 어필하고 다녔다. 차라리 80등이든 세 자리 숫자든 아예 확 멀어져 버리는 등수라면 아쉽지나 않지 정말 아까운 51등이란 등수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위해 떠받들어 주는 들러리 집합 그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리스트에 들지 못한 학생들을 자극하기 위해 붙여놓은 명단이었지만 나에게는 자극이 아닌 실망과 자포자기로 다가왔고 다음 시험은 더 열심히 해야지라는 마음조차 먹지 않게 됐다. '나는 애초에 전교권 등수에 들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앞으로는 그저 그런 루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거구나.' 하며 쉽게 포기했다.
마음은 불편하지만 몸은 편케 1학년을 보내고, 2학년도 마찬가지로 슬렁슬렁 학교를 다니고 나니 공부는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친구들은 다 다니는 학원인데 어려운 형편에 학원 보내달라는 얘기를 꺼낼 수 없었으니 학원문턱조차 가보지 못했고 당연히 학교보다 진도를 먼저 빼는 선행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불친절한 학교는 다수를 위해 소수 인원은 무시할 수밖에 없었고 선행을 모두 했다는 전제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선생님들은 교무회의 시간에 둥그렇게 강강술래를 돌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수업 시간에 "다 알고 있지? 이건 넘어가자."라는 유행어 아닌 유행어만 자꾸 유행시키셨다. 같은 공간이었지만 나만 모르고 다른 친구는 다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같은 수업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상위권 친구와 실력 차이는 점점 벌어져만 갔다. 시간만 좀먹고 허송세월 2년을 보내고 나니 나에게도 고 3이라는 반갑지 않은 시간은 찾아오고야 말았다.
파릇한 새싹이 돋고 마지막 추위가 꽃에게 시샘을 부리던 3월.
고 3 담임쌤과의 만남은 학창 시절 12년을 통틀어 참 특이했다. 진한 베이지 치마정장에 보이시한 헤어로 온몸에서 완벽함이 풍겼던 담임쌤은 까칠한 외모와 달리 아이들에게 인자한 선생님처럼 보이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처럼.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날 간략히 본인소개를 하시더니 16절지 크기의 종이를 맨 앞 친구에게 뒤로 한 장씩 전달하라며 이야기하셨다.
출처. 하비연 블로그
"선생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부담 없이 써서 내도록. 같이 1년 동안 생활할 건데 각자 원하는 게 있거나 하고 싶은 말을 스스럼없이 써서 내주면 선생님도 최대한 그에 맞춰주도록 노력할게."
당시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체벌이 꽤 심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체구가 작아 꼭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대답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선생님이 풀스윙으로 뺨을 때렸다가 그 친구는 교실 뒤 파란 쓰레기통까지 거의 날아가다시피 했다. 흡사 순간이동 같던 그 친구의 몸을 따라 50쌍의 눈동자가 도르륵 똑같이 이동했으니 뺨이 아픈 것보다 창피한 게 더 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를 맞는 일이 흔했으니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단체기합은 일상다반사였다. 별명이 변태였던 학생주임은 똑단발 길이가 귀 밑 3센티에서 1센티 더 내려왔다고 겨드랑이에 가까운 팔 안쪽 보드라운 살을 굳이 찾아 꼬집기도 했고, 50센티 두꺼운 자를 세워 손등을 때리거나 단단한 출석부를 세워 정수리를 때리는 선생님도 있었다.
아무리 "사랑의 매"라고 예쁜 포장지에 싸봐도 때리고 맞는 모습은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누아르물이나 피칠갑을 하고 싸우는 액션 영화는 잘 못 보는 나인데 학생들을 마치 자신의 감정쓰레기통으로 착각하며 자꾸 체벌을 하는 선생님들의 매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런데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을 쓰라니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우선 내 이름을 또박또박 쓰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정성 들여 눌러썼다.
선생님. 저는 혼나거나 꾸중을 들으면 잘하는 것도 더 못하게 되는 성격입니다. 맞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때리지 말아 주세요.
'이제 나는 체벌에서 제외되는 거겠지.'하고 부푼 꿈을 꾸었고 실제로 3학년 1학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다른 아이들은 혼나고 맞아도 유독 나만 체벌이 없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1학기 기말고사도 개떡을 치고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타성에 젖어 멍을 때리던 어느 날.
종례시간에 반 학생들의 성적표 꾸러미를 옆구리에 낀 담임선생님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교실로 들어오셨다.
그러더니 매우 화가 나신 얼굴로
"루시아! 너 나와!!!"
"네???"
우리 반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난 덜덜덜 떨며 교단으로 나갔다.
출처. wjddussorry 블로그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공부 이 따위로 할 거야?
때리면 더 안 한다길래 내가 중간고사는 그냥 넘어갔어! 근데 기말고사도 이따위로 본다고?
너 대학은 포기한 거니? 정신 안 차려?"
와... 선생님은 내가 학년 초 3월에 장난인 듯 진심인 듯 써낸 희망사항을 보고 정말 지켜보려 애쓰셨던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나이의 보통 다른 아이들의 하고 싶은 말이란 "숙제 조금만 내주세요." 라든가 "수행평가 조금만 내주세요." 같은 것이었을 텐데 "때리지 말아 주세요."라는 튀어도 너무 튀는 나의 희망사항을 보시고 "오호~ 요놈 봐라." 하며 벼르셨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번도 아니고 시험 두 번을 다 질펀하게 죽을 쒀 놨으니 결단을 내리신 거였다.
버럭 화를 내신 선생님은 희망사항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표정으로
"손바닥 대!!"
하시더니 두툼한 자로 다섯 대를 힘껏 내리치셨다.
한동안 체벌 없이 평온함을 누리고 몰랑몰랑한 자유를 만끽하던 손바닥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벌게진 손을 맞잡고 뒤돌아 내 자리로 오면서 전의를 다졌다. 기필코 성적을 올려 깐깐한 담임쌤의 높은 콧대를 반드시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노라고.
이를 갈고 부단히 노력하여 제일 어려웠다던 해의 수능을 무사히 잘 치렀다. 수능점수로 대학상담 순서를 정해 교무실로 한 사람씩 불렀는데, 평소 모의고사 점수가 내내 좋다가 실전에 죽을 쑨 우리 반 반장보다 담임쌤은 나를 먼저 교무실로 호출하셨다.
보기 두 개를 놓고 갈등했던 문제들은 내가 찍은 게 답인 경우가 많아 운이 좋게도 나는 모의고사보다 좋은 점수를 받아내었고 담임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겠다는 목적을 달성하였다. 때로는 따뜻한 격려나 응원의 메시지보다 "위플래쉬"에 나오는 플레쳐 교수처럼 미친 듯 닦달을 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내게 하는 건지 알쏭달쏭한 생각이 든다.
만일 담임쌤이 나의 희망사항을 끝까지 지켜주겠다며 꾸지람 없이 1년을 주욱 보냈다면 내 삶은 어땠을까. 더 나아질 일이란 없을 거라며 노력도 않고 안주하며 살고 있지 않았을까. 반 아이들 하나하나 놓지 않고 세세한 관심을 가지며 이끌어 주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마음이 아프더라도 채찍질해 주신 담임쌤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