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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쪼금 옛날에
약밥과 아이스크림이 버림받던 날
by
루시아
Mar 27. 2023
주는 대로 잘 먹었던 나는
알싸한 생강이라던가 매운 생마늘이 아닌 이상 반찬투정 따위는 하지 않았었지.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려운 형편에 반찬투정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쯤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그닥 눈치가 빠르지 않았는데도, 투정은 우리 집 형편에 어울리지 않다는 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았어.
어느 날 집에서 만든 약밥을 도시락에 예쁘게 싸서 가져온 친구가
약밥을 한 입 베어 물어보더니 입에 너무 안 맞았던지 머리를 굴리더라고.
약밥을 쿡 찍은 포크의 삼지창을 자꾸 아래로 향하게 거꾸로 드는 거야.
그렇게 거꾸로 들면 참기름내가 고소하게 나는 약밥은,
해님달님에 나온 참기름 바른 동아줄을 잡은 호랑이처럼 주르륵 미끄러져 떨어질 텐데.
그럼 최종 도착지가 뱃속인 약밥은 교실 마룻바닥에 떨어져 아쉽게도 못 먹게 되고 말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그냥 지켜만 보던 중인데.
그 친구는 이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데굴데굴 구른 약밥 온몸에 먼지가 잔뜩 묻었으니 말이야.
어설픈 연기를 펼쳐 실수처럼 반찬투정을 덮었고, 그 친구는 자신의 연기를 뿌듯해했지.
그 아이네 집은 부자라서 먹을 게 참 많았던 집이었나 봐.
언젠가 같이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샀는데
그 아이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샀고
나는 단단한 하드를 샀어.
부드러운들 어떻고 딱딱한들 뭐 어때.
더운 날 입안에 쏙 넣으면 시원하고
달콤해지는 건 결국 똑같으니까.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고백하자면 나도 처음엔 부드러운 느낌의 궁전모양 지붕을 담은 아이스크림을 잡긴 했는데 도로 내려놓고 단단한 하드를 잡은 거였어.
하드가
조금 더 쌌거든.
한데 그 부자친구의 입은 내가 한 입 먹어보고 싶은 그 아이스크림마저
쉽게 질렸던 모양이야.
한 두어 번 베어 물더니 그냥 들고 있더라.
그네가 있던 놀이터에 우린 잠시 앉아서 먹고 있던 중이었는데
누가 두꺼비집을 짓다 가버렸는지
봉긋하게 솟아오른 흙더미가 보였어.
그 친구는 들고 있던 부드럽고 하얀 그걸
흙더미에 그대로 거꾸로 처박았지.
"먹기 싫어."
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
열 살의 난 그때 뭔가 어렴풋이 깨달았어.
세상은 앞으로 참 쉽지 않을 거란 걸.
끝내 이룰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생길 것이고
그것은 꿈이 참 많은 나를 아프게 할 수도 있겠다는 걸.
https://youtu.be/bo_efYhYU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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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고 바쁜 인생에 감동, 웃음을 잠시라도 느끼시면 어떨까 하는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살아보니(?) 근심 없이 그저 웃고 속 편한 것이 제일입니다!!^^ 인생 뭐 있나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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