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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아이스 먹지 마세요

음식에 양보하세요

by 루시아


어릴 땐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뭐든 만져보고 싶고, 뭐든 맛보고 싶고, 뭐든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그래서 뜨거운 냄비를 살짝 만져보다가 너무 뜨거워 화들짝 놀라기도 했었고, 얼음을 무작정 입에 대었다가 혓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결국 피를 본 기억도 난다. 그중 소독차도 호기심을 채워주기 충분했는데 방귀 소리를 내며 허연 연기를 내뿜고 달리면 동네 모든 아이들은 뭐에 홀린 듯 소리를 지르며 소독차를 쫓아갔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좀비, 해맑은 좀비들의 모습과 견줄 수 있겠다.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나 또한 예외일 리 없었다.


소독차 소리가 나면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고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맨 앞을 사수해야 대장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연 연기가 뿜어져 나오면 그 안에 얼굴을 파묻고 우와아아아아 소리를 내며 따라 달렸다. 그 희뿌연 연기에는 기생충 죽이는 약이 들어있댔나? '내 몸에 있는 기생충을 다 죽여주니 좋지.' 하며 온 동네를 꼼꼼히 돌아다니는 그 차의 꽁무니를 줄기차게 쫓아다녔었다.


사실 기생충이야 눈에 안 보이니 내 알바 아니고 산신령이 되는 그 기분이 참 좋았다. "금도끼 은도끼"에 나오는 나무꾼에게 플렉스 하듯 도끼를 던져주는 산신령은 부자였으니까. 도끼를 세 개나 주고 다시 물 밑으로 유유히 내려가 사라지는 산신령은 그 아래에 도대체 금도끼는 몇 자루씩이나 모아 두셨길래 금도끼든 은도끼든 상관없이 하나씩 척척 내주는 것일까. 분명 산신령은 부자임에 틀림없다고 믿었다.



"엄마 백 원만, 백 원만." 했던 내가, 고작 소독차 연기로 내 온몸을 가리기만 하면 산신령이 되는 기회인데 놓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아이들과 함께 우르르 떼 지어 다니니 단합대회 느낌도 들고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놀이는 소독차가 임무를 완료하고 다른 동네로 떠나버리면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슬펐다. 산신령은 계속되어야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마당에 정체 모를 빨간 고무 대야를 발견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고무 다라"라고 했던 그 칙칙하고도 뻘건 고무 대야. 당시 큰 대문 안에 큰 마당을 앞에 두고 세 가구가 붙어 있는 구조의 집에 살고 있었는데 아마도 다른 집에서 필요했었는지 못 보던 것이 있어 호기심이 일었다.



고무 대야는 일곱 살 아이의 목까지 올 정도로 제법 큰 크기였는데 만일 안에 들어간다면 양팔 벌려 잡기 낙낙한 정도의 크기였다. 김장을 하려고 빌려온 것인가. 의아해하며 쳐다보았는데 그 안에서 희뿌연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꼬마 산신령이라도 있는 걸까? 고무 대야 가장자리에 목을 받쳐 걸치고는 고개를 폭 더 꺾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동그랗고 하얀 얼음이 보인다. 그건! 드라이아이스였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으니 그토록 원하던 산신령 놀이를 맘껏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산신령이 되기에 턱없이 적은 연기였지만 분명 얼음처럼 보이는 것에서 희뿌연 연기가 보글보글 생겨나는 게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일곱 살 평생 그렇게 신기한 장난감은 본 적이 없었다. 고작해야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딱지치기에 내가 그리고 오린 종이인형이 다였으니, 그 당시 놀잇감 가운데 가장 신선했다.



요새 사람들은 불멍과 물멍을 좋아한다. 멍 때리기 대회까지 있을 정도이니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멍"때리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다.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서 어쩔 수 없었던 아픔, 슬픔, 씁쓸함, 덧없음을 멍~~ 하며 치유하는 힐링의 시간을 가져야 살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만큼 불멍과 물멍이 중요할뿐더러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취미 중에 하나가 되었는데.



그 당시 콩알만 한 나도 뭐 그리 치유할 게 있었는지 한참 동안 그것을 쳐다보게 되었다.

멍~~~

당연히 입은 헤에~~~ 벌어졌고.


멍 중에 멍은 드라이아이스 멍이 최고였다.

고개를 들이대고 점차 크기가 작아지며 연기를 내뿜는 드라이아이스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얼음이란 건 녹으면 분명 물로 변해야 하는 것이거늘 바로 연기가 되어 날아가는 게 그렇게 희한할 수가 없었다. 그냥 쳐다만 봐도 재미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같이 쳐다본 언니는 지겹다는 듯 그만 집으로 들어갔고 나는 계속 남아 그 하얀 연기를 계속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 시간을 쳐다봤었나.



그만하면 되었지. 배꼽시계가 저녁 먹자고 나를 집으로 들여보냈는데 몸이 이상했다. 갑자기 몸살 기운이 나면서 어질어질하고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지경이 된 것이다. 너무 멍을 열심히 때렸나... 드러누웠다. 이제 고작 아홉 살이 된 언니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물수건을 만들어 내 작은 이마 위에 올려 주었다. 무척 고마운 일이긴 했으나 그건 살짝 찔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란 모름지기 동생을 잘 데리고 있어야 하고, 위험하지 않게 놀아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데, 엄마가 이제 곧 집에 돌아오시면 누워있는 날 보시곤 동생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언니가 돼서 넌 뭘 했느냐고 엄마한테 혼날 게 분명하므로 언니는 나를 빨리 낫게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지고 정말 저 멀리서 산신령이 나타나 나에게 손짓하는 걸 본 것만 같던 그 옛날의 하얗고 보드라워 보이는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한 추억이, 냉동고에 있던 아이스팩을 만지다 떠올랐다.

그때 엉뚱한 짓 했다고 엄마한테 혼이 났던가, 아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드라이아이스는 이산화탄소를 압축하고 냉각하여 만든 흰색의 고체를 말하며 영하 78.5℃로 매우 낮기 때문에 화상과 유사한 피부 손상에 주의해야 한다. 쉽게 승화되어 다량의 이산화탄소가 만들어지므로 환기가 중요하며 농도가 0.5% 이상이 되면 호흡이 가빠지고 두통이 생기며 심할 경우 의식을 잃을 수도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드라이아이스" 참고




사진 출처.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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