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라면 모름지기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가 당연한 거라 믿었으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0대까지만 해도 가능할 거라 굳게 믿었다만 30이 되면서부터 아무래도 운명 같은 만남은 나를 비켜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씩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여자 나이의 앞자리가 2일 때와 3일 때는, 내가 봐도 남이 봐도 숫자가 주는 느낌이 확 다르다. 자연스러운 만남이 어렵다면 인위적인 만남이라도 가져야겠기에 선을 봤다. 21세기에 선이라니... 주선자 없이 장소를 정해 둘이서만 만났으니 소개팅이라고 우겨본다.
낯가림을 하는 나와, 말솜씨가 유려하지 않은 그와 둘이 보내는 시간. 심심할 줄 알고 "적막"이 찾아와 함께 하지만 역시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침묵은 금이다"를 시전하고 있었다. 나름 격식 있던 자리라 이틀 전에 구매해 갖춰 입고 나간 흰 셔츠는 볼륨감 있는 바디라인을 살리기 위해 몸에 딱 붙는 사이즈였으니 가슴께 붙어 있는 단추는 지금 막 튕겨 떨어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겨우 붙어 있는 형국이었다. 둘이 약속이나 한 듯이 그도 멋진 슈트를 입고 나왔는데 기본 호감형 인상에 수트빨은 더욱 플러스 점수를 주는 요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멋있었다.
커피숍에서 만나 커피를 몇 모금 홀짝이며 둘이서 몇 마디 나누다 식사를 하러 가자고 일어났다. 그 근처 마땅히 아는 곳이 없는 차에 눈에 들어온 아웃백에서 칼질을 좀 하다가 영화관으로 가서 영화를 보고 나왔다. 멜로 영화를 본 것 같은데 영화제목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 놈의 기억력.
조금 걸으며 이야기하다 시간은 또 흘러 저녁시간이 되었는데 저녁까지 같이 먹잔다.
오호. 당일날 만나서 점심도 먹고 저녁까지 먹을 정도면 내가 싫지는 않은가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아까 낮에 점심을 먹을 때 이미 내 휴대폰 번호를 묻기는 했었지만.
낮엔 썰었고 우린 한국인이니 저녁엔 한식으로 결정하고 자리를 옮겼다.
점심을 조금밖에 안 먹었는데도 나의 뇌는 내 앞의 그가 굉장히 신경이 쓰이는지 배고픔 사인을 보내는 걸 깜빡한 모양이다. 배가 별로 고프지도 않았고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 앞이니 음식이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처음 만난 사람과의 자리에서 한식은 쉬운 음식이 아니었다.
한식의 대표반찬인 김치에는 고춧가루가 다량으로 들어가 있으니 이에 혹시 고춧가루가 낄까 봐 신경이 쓰였다. 밥과 함께 나오는 국은 된장찌개든, 김치찌개든 우선 국물 색부터가 진했으니 하얀 옷에 튈까 조심 조심하며 국을 떠야 했다.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으려면 하얀 밥만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싶었으나 반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 각종 반찬을 입에 떠 넣어줘야 하는데 씹는 것도 쩝쩝 소리가 날까 신경 쓰며 먹어야 한다. 게다가 내 앞에 처음 만난 상대와 일행인 것을 잊지 않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지 않게 대화까지 신경 쓰려면 거의 이건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임파서블한 미션을 수행하는 기분마저 든다.
그렇게 몇 번을 떠서 먹다 보니 꽉 눌러 담은 머슴밥도 아니고 애초에 나오길 고슬고슬하게 뜨다 만 밥인데도 불구하고 절반을 겨우 먹고 남기게 되었다. 더 먹었다간 셔츠의 단추도 정말 튕겨져 나갈 것 같고 밥도 딱 얹혀 체할 것만 같다. 앞사람 신경 써가며 조신하고 깔끔하게 먹는다고 노력했지만 고춧가루가 거의 빠지지 않는 진한 색의 반찬 양념들이 밥에 자신의 존재감을 약간씩 남겨 두었다. 앞에 앉은 건장한 체구의 그는 고슬고슬 밥공기 하나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나더러 다 먹은 거냐고 묻는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양이 원래 적은 척, 조금 먹는 척하게 된 내가 다 먹었다고 얘기하자 내 밥공기를 쓰윽 가져가 한 술 크게 떠 입에 넣는다.
허억...
얼핏 보기에는 깨끗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젓가락으로 내내 떠먹은 밥공기에 남은 밥이라 살짝 놀랐다. 코로나로 3년 이상 지내온 우리가 느끼기에 이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 당시 느낌은 좀 신기했다. 남이 먹다 남은 밥을 거침없이 저렇게 먹는 사람이라고? 멋지게 슈트 차려입고 내가 남긴 밥을 더러워하지 않고 맛나게 먹는 사람. 기분이 참 묘했다. 괜히 부끄러워져 내 볼이 발그레해졌다. 애정행각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내 밥공기를 가져다가 먹은 것뿐인데 뭔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나를 굉장히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밥을 같이 먹으면 친해진다고 하던데 둘의 사이가 급속도로 친밀해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출처.freepik
내 느낌은 맞았고 급하게 친밀해진 우린 지금
아이 둘의 부모가 되어 있다.
아까 금방도 저녁을 먹다가 내 그릇에 밥이 좀 많다고 얘기했더니 쓰윽 크게 한 숟갈을 떠서 자기 밥공기에 담는다. 결혼 14년 차에 서로의 밥공기에 숟가락이 들락날락거리는 건 이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지만 둘이 처음 만나서 밥 먹던 나의 젊고 예뻤던 그때, 어색한 둘이 갑자기 친해져 알콩달콩했던 그때가 떠올라 몇 자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