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 않게 물어봐

사람도 개가 될 수 있음을

by 루시아

고2.

점심을 먹고 쏟아지는 잠과 사투를 벌인 지루한 지리수업 5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학급 절반을 넘는 수가 폭격을 맞은 듯 쓰러져 잠을 잤다.

10분간의 꿀 같은 낮잠시간을 보내고 수업 시작 종이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데

6교시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으신다.

고2는 고3과 다를 바가 없다며 "지금 잠이 오니?"가 유행어셨던 쌤이셔서 매번 복도에서 수업 시작종이 울리길 미리 대기를 타시다가 "띵~동~땡~동~, 띵~동~땡~동~" 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어오시던 분이셨는데.

1분, 2분이 지나도 안 들어오시니 쉬는 시간 10분이 짧기만 했던 그때, 자고 있던 아이들은 계속 꿀잠을 끊지 않고 잤고 수다삼매경이었던 친구들은 횡재를 맞은 것 같은 기쁨에 더 재미난 수다를 이어갔는데,


갑자기 앞문이

벌컥~!!!

열리더니 교양으로 똘똘 뭉친 국어선생님이 어깨에 두른 숄이 펄럭 휘날릴 정도의 스피드로 피겨여왕 김연아처럼 스르륵 재빠르게 미끄러지듯 들어오셨다. 그리고는 교과서도 꺼내 놓지 않고 딴짓을 하고 있는 한 아이를 타깃으로 쩌렁쩌렁 큰 소리로 한 마디를 하신다.


"네 이년~~~~~!!!!!"


허얼...

선생님이 욕이라니!!

다른 과목도 아니고 국어 선생니미(재빠르게 타이핑하다 보니 니 밑에 미음 받침이 오른쪽으로 이사를 갔다. 한데 바로 위의 욕과 짝꿍을 이루는 것이 신기한 타이밍이라 그냥 두었다) 40명이 넘는 아이들 앞에서 욕이라니. 내 귀를 의심했다.


국어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욕으로 깜짝 놀란 동공 88개가 일제히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는데

욕과 함께 세트를 이루는 험상궂은 선생님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내가 언제 욕 따위를 했느냐라고 말하듯 고상하고 우아한 손동작으로 그 아이를 한 번 가리키고 본인을 가리키며 말씀하신다.


"너의 인연~ 나의 인연~ 우리의 인연은 과연 어떤 인연이길래

이렇게 한 공간에 모여 이 시간을 함께 하는 걸까요오???"



이 선생님 왜 이러시지. 방금 전 교무실에서 10분 쉬는 시간 동안 뭘 잘못 잡수셨나.

잠시 의아했지만 나른하게 쏟아지던 잠은 확실히 깨었고 수업은 최상의 집중력으로 들을 수 있었다.


아! 장범준의 "노래방에서"의 가사 중 "근데 그녀는 남자친구가 있었지"가 "근데 그년 남자친구가 있었지"로 들리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1분 36초... 충격...)




https://youtu.be/ss_E9t4CeeM




또 한 번은 공부하다가 궁금한 게 있어서 수업 종이 끝나고 선생님을 바로 쫓아 따라나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 물어볼 게 있는데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뜬금없이 팔의 소매를 둥개둥개 걷어 올리신다. 맨 살만 보이게 팔꿈치까지 걷어 부친 팔을 내 얼굴에 디밀며 한 마디 하신다.


"응~ 물어~"

"네?"

"물어 본다며어~ 대신~! 살살~ 안 아프게 물어 줘~"

"네???"


그제서야 내가 잘못 말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겸연쩍게 웃으며 고쳐 말했다.

"아아~~~ 여쭤 볼 게 있어요"

"아~ 그래?"

그러시며 옷을 주섬주섬 끌어내리신 선생님

"어떤 거? ^^"




그 당시는 '상당히 독특한 선생님이시네.'하고 '참 유별나셔~~' 하며 해프닝으로 넘겼는데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 떠나지를 않는다. 일주일 전 있었던 일도 요샌 가물가물한데 그 오래전 일들이 생생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창문에서 따사로운 햇살이 마구 쏟아져 내려와 교실 안을 환히 비쳤던 것도 같고.

고2도 고3 같던 하루 온종일 특별한 일이 없어 단조로운 날들 중, 참신한 방식으로 수업을 이끌어 가셨던 우아하면서 독특하셨던 국어 선생님 덕분에 숨통이 좀 트인 학창 시절이었다.


일요일 한가한 오늘

따사로움과는 거리가 먼 아직은 겨울 끝자락에

우연히 지인에게 "물어볼게요"라는 말을 쓰다 꽁꽁 덮어 두었던 나의 기억이 떠올라 흐뭇한 마음에 몇 자 적어 본다.





하마터면 멍멍이가 될 뻔했...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