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유연석 배우를 알게 된 영화는 송중기, 박보영 주연의 '늑대인간'으로 기억한다. 그 이전, '올드보이'의 유지태 아역으로 데뷔했지만 분량이 매우 적었기에 '늑대인간'이 먼저 떠오르는가 보다.
당시 영화로 그를 봤을 때는 못 보던 얼굴인데 야비해 보이는 역을 곧잘 하는구나 정도로만 알았지 그 악역을 맡은 이가 유연석이라는 건 한참 후에나 알게 됐다. 그가 낭만닥터 김사부의 강동주, 응답하라 칠봉이, 슬의생 안정원으로 자리매김하고서야 어찌 이 선량한 얼굴에 악역을 맡겼을까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러니한 건 당시 늑대인간을 볼 때는 얼마나 악역이 찰떡이었는지 전혀 이질감도 어색함도 느끼지 못했다는 거다.
그런 유연석이 미스터 션샤인의 구동매 역을 맡고 말보다는 눈으로 더 많은 대사를 했을 때 그에게 나는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자신이 원해서 백정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양반에게 천대를 받는 것보다 천민에게 천대를 받는 걸 더 못 견뎌하는 어린 구동매가 자라서 우수의 눈빛을 담은 구동매(유연석)에 빠지니 미스터 션샤인과 함께 바로 그를 떠나보내긴 너무 아쉬웠다.
마침 뮤지컬 헤드윅에 유연석이 출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배우와 한 공간에서 들숨 날숨을 같이 할 수 있는 극무대라고는 10대 시절 혜화동, 조촐한 소극장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김선경의 모노드라마 등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지만 "헤드윅" 공연은 이름만은 숱하게 들어왔던 뮤지컬이었다. 20대 후반 신승훈 콘서트도 간 기억이 나긴 하지만 뮤지컬은 좀처럼 볼 기회가 없었는데 친언니와 날짜를 잡고 티켓팅을 완료(2024년 4월 28일 오후 2시 공연)하니 심장은 두 근 반 세 근 반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출처. 쇼노트
유연석 vs 조정석
사실 캐스팅에 유연석과 조정석이 떡하니 자리 잡은 것을 보고는 좀 망설였다.
거미 남편답게 노래를 매우 잘하는 조정석이니 실제로 그의 연기를 직관하고도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도와 파라솔 밴드에서 리메이크했던 쿨의 '아로하'를 듣고 있자면 조정석이 부른 건지, 원곡자 이재훈이 부른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의 노래 실력이니 무대에서 접하면 꽤나 감동적이겠다 싶었고, 조정석의 잔망미도 매우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정도로 냉정하게 미모만 본다면 단연 유연석이 압승이다.
헤드윅은 알다시피 여장을 한 남자 배우가 출연하지 않던가. 실패에 가까운 수술이었기에 몸에 남아 남성임을 알리는 그놈의 1인치 때문에 여자도 남자도 아닌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외관상 보이는 부분은 여자니까 여자의 비주얼에 훨씬 더 어울리는 유연석이 좀 더 끌렸달까.
솔직히 말하면 이어지는 스토리보다는 웬만한 여자 뺨 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남자들이 여장을 하고 나온다는 말에 볼거리가 많겠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내적 친밀감이 한껏 느껴지는 조정석과 유연석이 주인공이고 그중 어떤 사람을 뽑을까 알아맞혀 보세요 딩동댕~ 하고 내가 골라 볼 수 있다는 것도 뭔가 짜릿했다.
동글한 얼굴에 개구진 표정을 잘 짓는 장꾸미 가득한 조정석과 그보다는 좀 더 큰 키에 늘씬한 몸매, 계란형 얼굴을 가져 여장이 더욱 잘 어울릴 것만 같은 유연석 중 끝까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역이 역이니만큼 여자가 여자로 오해할 정도로, 또 남자 관객을 홀릴 정도로 정말 예쁘게 하고 나올 것인지 궁금했으니 기왕이면 더 예쁜 결과물일 것 같은 유연석으로 결정! 미스터 션샤인에서 구동매로 분해 매우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유연석이었기에 반전매력을 상상하니 내 가슴은 설레기까지 했다.
뮤지컬이 시작되고 방송에서 봤을 때와 전혀 다른 유연석의 모습을 보는데 아~ 이 맛에 뮤지컬을 보러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달까. 현장감이 어마어마했다. 옷과 화장, 가발 심지어 의자에 앉아 있는 자태까지 모두 여성스러움의 극치라 감탄이 나왔다. 가끔씩 드러나는 넓은 어깨가 아, 원래 유연석은 남자였지 하고 일깨워 주었다.
후에 어느 영상에선가 유연석이 지금 이 명성을 얻기까지 오디션을 100번도 넘게 봤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저 외모에 저 키에, 저 덩치에 그냥 여기저기서 어서옵쇼 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 역시 손쉽게 주연 자리를 꿰찬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헤드윅 주연을 맡았던 다른 배우는 또 누가 있었을까
유연석 이전의 예쁘장한 남자 배우들은 그럼 누가 있었는지 참 궁금하다.
다른 배우들의 모습도 한 번 보자면 조정석, 윤도현, 조승우, 정문성, 변요한 등등 '저 노래 좀 합니다' 하는 남자 배우들은 한 번씩 모두 거쳐간 게 아닐까 싶은 정도다.
출처. 블로그. 레이니온의 작은 사물함
출처. 중앙일보 (각 배우들의 강렬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윤도현은 터프해 보이고 조승우와 김재욱은 무척 아름다우며 조정석은 뽀드윅이라는 별명답게 참 살결이 뽀얗다.)
유연석이 부른 인상 깊은 노래 "OPEN ARMS"
헤드윅 무대를 하는 주연 배우들은 하나씩 자신만의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데 유연석의 목소리로 듣는 오픈 암스는 옛 추억이 함께 떠오르는 노래였다. 이 좋은 노래를 그동안 잊고 살았다니.
유연석의 담백한 '오픈 암스'를 올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영상은 찾을 수 없어 원곡으로 대체한다. 유연석의 '오픈 암스'를 직접 듣고 싶다면 뮤지컬 티켓을 끊고 보라는 이야기겠죠?
무대 위 밴드 연주자와 배우들이 손을 잡고 인사를 하고 무대가 끝나는가 싶었지만 관객들은 앙코르 공연을 내놓으라며 끊임없이 박수를 쳐댔다. 역시나 못 이기는 척 배우들은 다시 나와 무대를 채웠고 유연석은 갑자기 관객석 한 곳을 쳐다보며 "형님, 괜찮아요? 안 힘드시겠어요?" 하고 지인을 챙겼다. 친인척이나 선배겠지 했는데 무대로 나오시라고 권유까지 했다. 그 지인은 다름 아닌 유재석, 지석진, 양세찬이었다!
그리고 다시 광란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점프 점프 쉴 새 없이 뛰는 점프에 왕년에 메뚜기였던 유재석은 제 철 만난 메뚜기가 되어 점프 점프하고, 지석진은 이츠학과 즉흥 연기까지 선보이고, 그리고 양세찬은 생각보다 미남이었다. 관객석에서는 끊임없는 환호가 이어졌다.
뮤지컬 도중 유연석이 관객석으로 뛰어가 앉아 있는 관객 위에 서서 춤을 추는 일명 카워시를 할 때 모두가 난리가 났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양세찬이었던 걸 앙코르 무대에서 유연석이 말을 해주어 알게 됐다.
헤드윅은 2024년 3월부터 6월 23일까지 무려 석 달에 걸쳐 공연을 하던데 어쩌면 그리 날짜, 시간 딱 맞춰 연예인들과 함께 공연을 보게 된 건지 그 시간을 선택한 나 자신이 매우 기특하다.
출처. 더쿠 - 헤드윅 공연 도중 아버지한테 카워시(의자위에 올라가 허리흔드는 퍼포먼스)한 유연석 (theqoo.net)
두 시간 반이라는 짧지 않은 공연임에도 인터미션이 없다. 때문에 뮤지컬 시작 전에 공연 관계자들은 화장실을 미리 다녀오라고 여러 번 말했고 중간에 문을 나서면 진행 규정상 들어올 수 없다는 공지도 했다. 가만히 앉아 구경하는 관객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봐야 하는데 극을 이끄는 배우들은 더욱 그러할 터. 중간에 대사를 확인할 시간도 없고, 헤드윅, 이츠학 오로지 두 배우가 무대를 이끌어 가는데 그마저도 이츠학은 굉장히 과묵한 역이니 헤드윅을 맡은 유연석 혼자서 그 긴 시간을 내내 말하고 연기했다. 대사가 무척 많고 길다 보니 물론 살짝 변형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 긴 대사를 다 외운 건 참으로 대단해 보인다. 피 튀기는 티켓팅이라고 일명 피켓팅으로 유명한 조승우조차 중간에 대사를 잊어 매우 당황한 적이 있다는 에피소드를 듣고 난 후라 더 멋져 보였달까. 관람객들이 하나둘 관객석을 채우는 동안에 무대 뒤에서 의상을 갖춰 입고, 화려한 화장을 하느라 분주했을 모습을 상상해 보니 내가 다 떨리던데. 아무튼 TV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역할을 훌륭히 해내 준 유연석 배우의 앞날을 앞으로도 쭈욱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