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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May 04. 2024

한 사내가 내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뭔 일이래 도대체

딸아이의 소풍날이다.

나 어릴 적 소풍이라 하면 뒷산 어디메쯤 올라 실실 돌아다니며 보물찾기 좀 하다가 뽐내듯 장기자랑 좀 하고 반끼리 모여 수건 돌리기 좀 하다가 삼삼오오 모여 엄마가 싸준 도시락 까먹고 자유시간 좀 갖다가 또 모여 놀다가 해산했던 지라 산에는 식당이 있을 리 없으니 당연히 집에서 도시락을 챙겨가야 하는 거였다만 초등학생도 아닌 중학생이 된 아이의 소풍 도시락이 웬 말이냐.



전국적으로 학교 점심은 이제 모두 학교 급식으로 해결하고 나 같은 경우는 센터에서 저녁밥까지 아이들 손에 도시락을 쥐어 주니 나는야 그야말로 니나노 늴리리야 날라리 엄마일 뿐인데 갑작스러운 소풍 도시락, 그것도 재료 손질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김밥을 쌀 생각에 며칠 전부터 초초초긴장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게다가 낮밤이 바뀌어 밤늦게 잠들면 아침에 아이들이 먼저 기상하고 흔들어 깨워야 눈을 겨우 뜨는 불량 엄마인데 소풍 당일이라 해서 불량이 정품으로 바뀌겠느냐 말이지. 



딸아이에게 소풍 도시락에 대해 슬쩍 운을 뗐더니 집김밥보다 산 김밥이 더 맛있다며 김밥을 사서 가져가면 안 되느냐고 말한다. 정말 밖에서 산 김밥이 맛있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늦잠꾸러기 엄마가 고생할 걸 알고 일부러 밖의 음식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는 건지 통 분간이 안 간다. 아직도 한참 어린애 같다가도 또 어떨 땐 한 없이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딸아이라 하얀 거짓말 같으니, 속엣말만 정확히 얘기해 주면 참 좋겠다만 뱃속에 열 달을 품고 있었어도 딸의 속내는 참 알 수가 없다. 아침 댓바람부터 어느 김밥집이 문을 열겠니 일축하며 행여 편의점에서 김밥을 판다 하더라도 매일 싸는 도시락도 아니고 1년에 한 번 싸는 소풍 도시락인데 하는 마음에 죽으나 사나 김밥을 말아야겠구나 싶었다. 



소풍 바로 전날 김밥 재료를 사다 놓긴 했다만 얼레벌레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역시나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자면 죽었다 깨어나도 일찍 일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다. 밤을 새우는 수밖에. 너무 일찍 김밥을 싸두면 점심시간까지 시간이 벌어지니 도시락 완성은 최대한 나중으로 미뤄야 해서 노는 김에 에라 모르겠다 더 탱자탱자 놀았다. 한 5시쯤에 밥을 안쳐도 여유가 있겠지 싶어 책도 읽고 영상도 보고 니나노 늴리리 늴리리야 여유를 한껏 부렸다. 놀 때 시간은 어찌 그리 쏜살같이 흐르는지. 5시 알람은 금세 울렸고 나는 발딱 일어나 행동을 개시했다.



오래간만에 김밥을 싸는데 김밥 열 줄은 뭔가 좀 아쉬웠다. 음식이란 모름지기 남더라도 넉넉한 게 제 맛이지 먹다가 부족하면 안 만드니만 못하다는 신념으로 김밥세트를 두 개나 집어 왔더니 그 양에 맞춰 세트 안에 없는 당근 밑손질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씻고 껍질을 깎고 채칼 눈금 조작이 말을 안 들어 직접 썰기까지 하느라 벌써 기운이 빠진다. 그래도 어쩌겠나. 한 프라이팬으로 모든 재료를 볶아내 설거지를 줄이려면 당근은 주황색이 묻어 나올 테니 잠시 밀어 두고 얼른 계란 열 개를 풀고 두 번에 나누어 지단을 만들었다. 맛살과 햄을 김밥 속재료에 맞는 크기로 잘라 프라이팬에 살짝 볶고 제일 마지막에 당근을 볶아가며 어질러진 주방을 대충 정리하는데 한 솥 가득 안친 김밥 스무 줄을 감당할 대용량의 밥은 벌써 다 되었다고 잘 저어달라며 부탁인지 명령인지를 내게 말했다.  



슬슬 힘도 들고 왜 때문인지 머리가 아프다. 달거리가 왔다 간지도 여러 날 됐는데 왜 머리는 아프고 난리일까. 낮에 두통의 조짐이 있길래 미리 철분제 한 알을 먹었는데도 두통이 가실 줄을 모른다. 근래 들어 이렇게 심한 두통은 처음이다. 최강의 두통은 두통약으로 다스릴 밖에. 별 수 없이 약통을 들여다보며 타이레놀을 찾는데 통만 덩그러니 속은 비어 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편의점에서도 두통약은 살 수 있다지만 김밥 준비를 하다 말고 편의점 가기는 또 너무 귀찮고 번잡스럽다. 딱따구리가 나무 기둥을 쪼아대듯 머리가 너무 지끈거리는데 약이 없다니 환장할 노릇이지만 귀찮음이 이겼으니 어쩔 수 있나. 다 된 밥을 양푼에 퍼 담고 통깨를 여유 있게 뿌리고 소금, 설탕을 톡톡 뿌려 간을 해 준 후 참기름을 휘익 두르고 주걱으로 열 십자를 그려가며 잘 섞어 주었다. 각종 재료들을 앉은뱅이 상 앞에 두고 하나씩 하나씩 빠지지 않게 주의하며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따끈한 김밥 하나 완성. 미끄러지지 않는 빵칼로 예쁘게 썬 다음 꽁지 하나 집어 먹었는데 역시! 어릴 적에 엄마가 해줬던 김밥 맛이 난다. 내가 먹고 싶었던 건 다디단 집김밥~





김밥이 한 줄, 두 줄 완성이 돼 갈수록 지끈거리던 내 머리는 이제 절반으로 딱 쪼개지기 일보직전이다. 김밥을 싸며 인상을 쓰고 있는데 어느새 일어나 엄마가 김밥을 싸는 걸 구경하던 막둥이가 김밥을 만드는 일이 많이 힘든가 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이들에게 먹는 것 가지고 부담을 주면 안 되지 싶어 요리가 힘든 게 아니라 두통 때문에 잠깐 힘들어서 엄마 표정이 엉망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막둥이 왈,


"엄마,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아빠가 돈 벌어오고 하는 건 우리가 행복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근데 엄마가 아프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응?"


하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한다. 

너 어디 나 몰래 연기학원 다니니? 인상 쓰다 말고 웃음이 피식 나온다.


조금 참으면 괜찮아지겠지 하던 두통이 오히려 강도가 점점 세졌다. 야근하고 이제 곧 아침에 돌아올 남편에게 SOS를 쳐야겠다 마음먹고는 내 두 손은 바쁘니 한가한 막둥이에게 부탁했다.


"아빠한테 엄마 머리 아프다고 집에 오는 길에 타이레놀 좀 사다 달라고 톡 좀 보내 줄래?"


엄마가 아파도 자신은 아픈 엄마를 위해 딱히 뭘 해 줄 수 없어 안타까웠던지 막둥이는 엄마가 부탁을 해오자 드디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다행이라는 듯 냉큼 일어나 내 핸드폰을 열고 아빠에게 톡을 보낸다.


두통 때문에 약을 사다 달란다고 하면 될 것을 두통 증상이 있다며 '증상' 단어를 굳이 갖다 붙인 문장을 보고는 '풉'하고 인상 쓴 얼굴에 안 어울리게 또 미소가 피어올랐다. 


옛날 아낙들이 머리 아플 때 이마에 흰 띠를 질끈 동여매던데 딱 그 모양새로 동여매면 좀 나을까 싶었지만 내 양손은 위생장갑을 끼고 있고, 김밥 20줄은 산으로 쌓여 있고, 이마를 질끈 매는 띠 따위는 집에 없으니 그냥 이를 악물고 김밥만 써는 수밖에. 겨우 겨우 기운을 내어 김밥 도시락과 과일까지 챙겨 넣은 후 아침으로 김밥을 먹이고 학교 갈 준비가 다 끝난 아이들을 데리고 드디어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한 남자가 내 뒤를 따라붙는 느낌이 났다. 출근 시간이라 다급한가, 그래도 그렇지 왜 이리 내 뒤에 바짝 붙어 걷는 거지, 먼저 가고 싶으니 길을 좀 비켜달라는 이야기인가 싶어 벽 쪽으로 바짝 붙어 걷는데도 나를 추월해서 앞으로 가질 않는다. 뭐지, 괜한 오지랖인가 싶어 다시 원래 속도로 천천히 내려오는데 어랍쇼? 이젠 내 귀에 가깝게 들릴 정도로 '휴휴휴휴' 더러운 호흡으로 이상한 소리까지 내며 내 뒤를 더욱 바짝 붙어 걷는다. 뭐야, 이 사람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볼 용기도 없다. 이미 가까워진 얼굴인데 내가 고개를 돌린다면 더 가까워질 테니 직접 대고 확인할 수도 없다. 만일 정말로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라면 난 분명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상해도 너무 수상해서 얼굴은 최대한 돌리지 않으면서 최대한 곁눈질로만 내 뒷사람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려는데 갑자기 그 사내가 내 손을 콱!! 잡는 게 아닌가.


"악!!!!!!!!!!!!!!!"


그 사람은......








신랑이었다. 어휴 C!! Tlqkf 없는 애도 떨어지겠네.


"뭐야, 이 인간아!!!"


와아... 얼마나 놀랐는지. 그리곤 내 손에 있던 차키를 뺏어 아이들 쪽으로 나를 추월해 앞으로 나아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내게 안녕~하듯 태평하게 손을 흔드는 남편. 원래 아이 등교 후에나 집에 도착하는데 어찌 이렇게 타이밍도 적절하고 딱 맞게 집에 도착한 거지? 덕분에 나는 바로 유턴하여 집으로 들어와 차키와 맞교환한 약을 얼른 입에 털어 넣었다. 거짓말처럼 두통은 사라졌다.


새삼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죽으나 사나 아픈 머리 관자놀이를 눌러가며 운전해서 아이들을 등교시켜 줘야 했던 상황인데 마누라 아프다니까 흑기사처럼 시간 맞춰 쫜 나타나 나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에 가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이래서 혼자 살지 않고 남자와 여자는 결혼해서 함께 사는 건가.


신랑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리고 어찌 보면 별 것도 아니고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을 감사하게 표현하는 나 자신에게도 참 착하고 참한 아내구나 하고 스스로 칭찬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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