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대리에 대한 열망
나는 대리에 대해서 꽤 오랜 시간 열망해 왔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직급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나는 첫 직장 생활부터 직급 없는 수평적 스타트 업에서 오랜 시간 일을 해왔기 때문에 따로 직급이 없었다. 물론 진짜 수평적이었느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스타트 업에서 직접 재봤는데 정말 날카로운 90도, 수직이었다. 수평적 접근이라고 해봐야 고작 이름 뒤에 님이나 쌤을 붙이거나, 아니면 영어 이름까지 만들고 뒤에 님을 붙여서 이게 회사 모임인지 인터넷 커뮤니티 모임인지 알 수 없는 수평 지향적 수직 문화였다.
직급이 없으면 단순히 호칭 문제만 발생하는 게 아니었다. 직급이 있으면 기대되는 연봉 테이블이라도 있을 텐데 이건 엿장수보다 제멋대로였다. 저 새끼가 왜 저만큼? 아니, 저분은 왜 저거 밖에?라는 의문이 들어도 기준이 없었기에 억울함만 깊어 갔다. 나는 이럴 거면 차라리 정확한 직급을 달라고! 라며 모호해지는 연봉체계 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스타트업은 직급 없다며요. 아니다, 직급이 있었다. 직급은 팀장급부터 발생했고 그분들은 님, 쌤이 아닌 팀장님, 부장님, 센터장님 등등 직급이 있었다. 아래 대리, 주임, 사원과 같은 연차 별로 안 찬 사람들만 수평적이었다. 그룹으로 데뷔한다면 임원들과 그 외 이런 이름이 그룹명이 될 것이다.
이건 다른 얘기지만, 직급이 아주 특이했던 곳도 있었다. 스스로 직급을 만들어서 명함에 박아 넣는 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김 아무개 오라클 씨였다. 영문으로 Oracle Kim John이라고 뒷면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이 분을 Oracle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아니면 김 아무개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치열한 눈치싸움 끝에 아무개님이라 불러 드렸다.
이런 상황을 자주 겪으신 것 같은 그분이 겸연쩍게 웃으며 오라클의 뜻을 나중에 알려주셨다. 본인은 벤처 캐피털에서 일하기 때문에 오라클처럼 투자 성공을 예언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렇게 직급 작명을 하셨다고 했다. 이런 엄청난 작명 센스를 가진 오라클 씨는 나중에 스몰톡을 통해 결혼도 하셨고 아내분이 임신 중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라클 씨는 아이 이름을 어떻게 지었을까 사실 지금도 궁금하다.
김 아무개 오라클 주니어… 너의 미래를 응원해.
아무튼 직급에 대한 사건을 겪은 나는 말하는 것이다. 저기서 오늘도 정치질에 빛나는 부장을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면 이건 수평이 아니라고 당신들은 지금 90도의 가파른 수직 문화에 있다고.
스타트 업을 조금 길게 다녔던 나이기에 직급에 대한 열망을 꽤나 오랫동안 앓아 왔다. 승진에 대한 욕심보다 직급을 거머쥐고 싶은 욕심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직급에 대한 욕심은 외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시작하면서 더 커지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일만 할 때는 몰랐던 문제가 하나 발생한 것이다. 명함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름 하나만 쓰여 있으니 주고받을 때 어떻게 물어야 되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어느 정도 짬이 차고 나서야 대충 매니저라 불러 달라고 했지만, 완전 신입 시절에는 그 질문에 대답이 참 막막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편하게 부르시라 했더니 신입 시절 부장님 소리도 들어보고, 대리, 주임, 과장…. 사장 소리 안 나온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당시 너무나도 당돌했던 신입인 나는 딱히 대답할 말도 없어서 부장님 소리를 들으며 거래처의 진짜 찐 부장과 맞다이를 떴다. 의외로 그 분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좋은 관계라는 건 개인의 의견이 다분하므로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부르고 정정하지 않은 신입사원에 대한 찐 부장의 의견은 영영 미궁 속으로 빠졌다.
무의미한 직급을 남발하는 스타트 업을 규탄한다 이것저것 보장하길 원하지만 직급부터 보장하라!
나는 정말로 소망한다, 직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