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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by 류장복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_oil pastel, acrylic on cotten_193.9x259.1cm_2024


수백조각의 쇠비늘을 덧댄 것 같은 갑옷을 입고 당신은 고층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다. 머리부터 바닥에 부딪혔는데도 죽지 않고 다시 비상계단을 걸어오른다. 다시 옥상에서 서슴없이 낙하한다. 이번에도 죽지 않고 비상계단을 오른다, 한번 더 떨어지기 위해서. 그렇게 높은 데서 떨어지는데 갑옷이 무슨 소용이야. 한겹 꿈을 열고 나오며 당신은 자신에게 묻는다. 그러나 깨어나는 대신 다음 겹의 꿈으로 스며들어간다. 거대한 빙하가 당신의 몸을 내리누른다. 고체인 당신은 으스러진다. 빙하 아래로 흐르고 싶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바닷물이든 석유든 용암이든, 어떤 액체가 되어서 이 무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그 꿈까지 열고 나오면 마침내 마지막 겹의 꿈이 기다리고 있다. 회백색 가로등 아래에서 어둠을 지켜보며 당신은 꼿꼿하게 서 있다.

생시에 가까워질수록 꿈은 그렇게 덜 잔혹해진다. 잠은 더 얇아진다. 습자지처럼 얇아져 바스락거리다 마침내 깨어난다. 악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기억들이 조용히 당신의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있다.


19:30


그 소리를 듣고 있었어.


소리 때문에 깨었지만 눈을 뜰 용기가 없어서, 눈을 감은 채 어둠을 향해 귀를 세우고 있었어.


고요히, 더 고요히 울리는 발자국 소리.

느린 춤의 스텝을 연습하는 아이처럼, 반복해서 제자리를 딛는 두 발의 가벼운 울림.


명치를 죄어오는 통증이 느껴졌어.

공포 때문인지, 반가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어.

마침내 난 몸을 일으켰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가 문 앞에서 멈췄어.

방이 건조해 문고리에 걸어뒀던 물수건이 어둠속에 희끗하게 드러나 있었어.


소리는 거기서 들린 거였어.

거기서 물방울들이 끝없이 떨어져 장판 바닥을 흠뻑 적시고 있었어.


02:50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03:00


당신이 앉은 곳에서 일부만 보이는 응급실 내부는 여전히 대낮처럼 불이 밝혀져 있다. 어린아이인지 젊은 여자인지... ...


3:20


그 밤 이후로는 젖은 수건을 문고리에 걸어두지 않았어.


하지만 그 겨울이 갈 때까지, 더이상 물수건이 필요 없는 봄이 된 뒤에도 그 소리가 문 쪽에서 들렸어.

아직도 이따금, 용케 악몽 없이 잠에서 깨어나려는 순간이면 그 소리가 들려.

그때마다 난 어둠을 향해 떨리는 눈꺼풀을 열어.


누구야.

누가 오는 거야.


누가 이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오는 거야.


4:30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


4:50


언니를 만나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나는 몰라.

내가 언니에게 등을 돌리던 순간,

심장에 시멘트를 붓듯 언니에 대한 모든 것, 복잡하고 뜨겁고 너덜너덜한 모든 걸 단번에 틀어막으려던 순간,

그 순간을 감쪽같이 건드리지 않고 언니를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 한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5:00


아니,

언니를 만나 할 말은 하나뿐이야.

허락된다면.

부디 허락된다면.


장례식장과 응급실로, 병동과 병원 정문으로 갈라지는 도로를 밝히던 외등들이 일제히 꺼진다. 도로 가운데 그어진 흰색의 직선을 따라 당신은 얼굴을 들고 걷는다. 선득한 빗방울이 당신의 정수리에, 당신의 운동화가 내딛는 아스팔트에 떨어져 번진다.


죽지 마.



죽지 말아요.


(소년이 온다, 밤의 눈동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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