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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장복 Mar 26. 2022

아버지

신일병원에서

2021.12.6 15:59 아버지_oil on linen_45.5x45.5cm_2022

아버지가 먼길 떠나신 지 백일이 지났다. 기억 속의 온기가 채 가시기 전에 그림으로 옮겨 놓으려고 진즉 맘먹었건만 몇 차례 시도 끝에 겨우 그다. 더 전개해 보려고 한다. 2022.3.26 륮


아버지, 오늘 첫눈이 내렸습니다. 펑펑 함박눈이 쏟아졌습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눈송이마다 지난 기억이 스며들었고 당신은 지구별에서 맺은 인연을 훌훌 벗어던졌습니다. 얼굴을 뒤로 젖혀 받아낸 눈송이 하나가 천천히 녹아내렸습니다. 뾰족하게 차가운 통증이 가까운 기억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화가 류해윤, 당신은 지난 4월 이후 곡기를 거의 끊다시피 한 가냘픈 몸으로 화가의 열정을 몽땅 불사른 끝에 12월 10일 새벽 3시 5분 생을 마감했습니다. 남은 자식들은 죽음을 향해 잦아드는 당신을 곁에서 느꼈고 삶과 죽음이 어떻게 교차하는가를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봄의 기운이 완연한 4월의 끝자락에 문호리 막내네 집 앞마당에서 가느다란 손목을 내보이며 '이 달을 못 넘길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입원 치료하여 한 고비를 넘긴 후 걷기와 그림 그리기에 전념했습니다. 언제쯤 밥을 먹을 수 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조금씩 기울어져 갔습니다. 다시 입원했고 물리적인 의료장치를 완강하게 거부하며 여분의 자생력으로 버텼습니다. 한편으론 저벅저벅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천도 통조림 복숭아'를 먹고 싶다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나을 병이 아닌 것 같다'며 중얼거렸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힘이 모아지는 대로 붓을 들었습니다. 평소 한 시간 분량을 대여섯 시간에 걸쳐 그렸습니다. 비쩍 마른 노구를 일으켜 옥탑방 작업실에 들어가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심지어 액자까지 만들었습니다. 큰아들과 맞손주의 손을 빌려 삐뚤삐뚤한 채로 완성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또렷한 기억력과 무통증에 힘입어 연명 수준의 삶을 뿌리쳤습니다. 한 달여 간병인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전까지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 대해 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거대한 그늘에서 도망칠 수 없음을 진즉에 알아차렸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그림을 보고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몸 전체로 느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몸을 씀으로써, 오감을 곤두세워 기억과 결합시킴으로써, 그림에 몰입함으로써 죽음에 맞섰습니다. 당신의 그림은 죽음을 앞에 두고 벌어지는 삶의 절절한 노래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저항이자 순응이었습니다.


아버지.. 다른 별에서는 부디 이번 생처럼 어리석은 자식놈 치다꺼리로 꼬박 70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붓을 잡지 마시고, 모쪼록 일찌감치 당신의 뜻을 붓끝에 실어 펼쳐내시기 바랍니다. 이승을 떠나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며 못난 자식이 고개를 떨굽니다. 제 발등을 찍고 부서지는 눈물을 하염없이 바라볼 따름입니다. 아부지.. 먼길 살펴가세요!  2021.12.18 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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