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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장복 Mar 27. 2022

아침이다

_oil on linen_116.8x91cm_2022

전엔 그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주로 표면에서 감각의 전투를 일삼았다. 팬데믹을 맞아 작업실에 갇힌 후부터 달라졌다. 표면의 전투가 훨씬 잦아졌고 그만큼 그림의 안쪽으로 들어갈 기회가 생겼으며 머무는 시간도 늘어났다. 기억을 눈앞에 끄집어내 감각하는 시간이 많아진 셈이다. 오래된 기억의 주름이 펴졌다.


끌쩍거린 엽서그림을 차비 삼아 캔버스 그림이라는 열차를 탄다. 응시의 눈으로 함축된 이미지를 역깔때기로 증폭시키는 관조의 시간이 시작된다. 그때부터 무수한 기억 쪼가리가 달라붙는다. 사색의 여정이 개입된 그림의 안쪽 세계가 열린다. 좀 과장하면 거기에서도 현실세계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림이 온전해지면 떠나보내고 다른 그림으로 갈아탄다. 이 또한 반복된다.


매번 새 열차를 타는 건 아니다. 내리지 못해 우물쭈물거리거나 타고 보니 같은 열차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가장 힘든 건 말이 기수에게 등을 내주지 않는 것처럼 승차를 거부당할 때다. 그러면 그저 작업실의 한 귀퉁이에 한 점으로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마다 바깥을 배회할 수 있었던 팬데믹 이전이 그리웠다.


가만히 견뎌야 하는 시간이 거듭되다가 어느 순간 기다림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생각해보면 현실세계를 등에 지고 담장 위에 올라앉아 날기 위해 뛰어내리기를 무한 반복하는 업보를 지녔다. 날 수 없지만 날기 위해 몸을 던진다. 뛰어올라 체공의 자유를 누린다. 기다림의 시간을 체공의 순간과 기꺼이 맞바꾸며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2022.3.27 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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