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점자 '시어머님 사친가'
김점자 –‘우리 어머님이 제 스승이니더.’
제24회 전국 내방가사 경창 대회에서 창작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김점자 어르신이 지은 내방가사 제목은 ‘시어머님 사친가’다. 친정어머니도 아닌 시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은 가사로 내용 또한 듣는 이에게 눈물을 짓게 만든다.
시어머니는 류수향 님은 지난 2020년 103세로 돌아가셨다. 1946년생인 김점자 씨는 19세에 시집와 올해 78세로, 56년 동안 시어머니를 모셨다. 강산만 5번 넘게 변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함께한 탓인지 김점자 씨는 지금도 시어머니를 잊지 못한다. 대개 시집살이가 혹독했을 거라고 짐작하는데 김점자 씨와 시어머니는 보통 고부 사이를 넘어 어머니와 딸처럼 다정하고 좋았다고 한다. 시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시어머님 사친가’를 읽어보면 다정다감했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눈에 선하다.
“하루하루 가는세월 어찌이리 빠르는고
어느노래 가사처럼 신속하기 그지없다.
가는내삶 돌아보니 걸어온길 고비많고
남이가는 그길따라 최선인줄 알았는데
남의삶은 평탄하나 나의삶은 꼬불꼬불
....
여섯 살에 모친죽고 오빠하나 동생하나
우리부친 인생살이 앞이캄캄 기막혀라
일가친척 주선하여 새장가를 가고보니
궁하기만 하던가정 새어머니 불만족은
우리남매 가시되고 투명인간 그뿐이라
엄동설한 추운날에 속옷없이 옷을입고
시킨일을 해야하니 살얼음에 할퀴어도
아프다고 말못하고 눈물마저 얼음되니
사람모습 아니었고 부석괭이 다름없다”
<김점자 “시어머님 사친가”>
여섯 살에 어머니 여의고 새어머니 품에서 자란 김점자는 어릴 때부터 고생을 모질게 했다. 내방가사 내용만 봐도 어미 없는 자식들을 향한 계모의 횡포가 눈에 선하다. 한겨울에 속옷도 입지 않고 살얼음을 헤쳐 빨래하고 밥하고, 소설 속 콩쥐와 다름없이 혹독한 설움을 겪으면서 자랐다. 19세에 부자라는 친척의 말만 믿고 혼사를 치르고 보니 친정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시댁 가세에 원망도 많았다고 한다.
“어른들이 시킨대로 차일치고 혼인하여
시집이라 가서보니 아랫마을 이웃이라
대문밖이 처음이나 이런일이 또있는가
무슨운명 이러한가 부자라던 시댁집은
친정집과 다르잖고 이렇게도 속일수가
부모원망 내자탄은 나의팔자 이뿐인가
눈치보는 새신랑과 안절부절 시어머니
이럴수도 저럴수도 마음다시 가다듬어
정붙이고 살다보니 이곳바로 내집이라”
<김점자 “시어머님 사친가”>
안동시 임동면 고천 2리에서 태어난 김점자는 지금도 임동면에서 산다. 결혼하고도 고향을 떠나지 못했다. 9살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은 그녀는 안 해본 일 없을 정도로 집안일을 많이 했다. 결혼하고서는 가난한 살림을 일구기 위해 농사를 열심히 지었다. 친정에서 몸에 밴 일하는 습관이 농사일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새신랑과 시어머니의 사랑은 지극했다.
친정과 시댁의 가족 분위기도 아주 달랐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따스하게 품어주면서 그녀의 결혼생활은 사랑과 정을 느끼는 좋은 모습이었다. 시어머니는 생모 없이 계모 밑에서 자란 며느리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딸처럼 여겼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생각했다.
“시어머니 애휼속에 남편사랑 지극하다.
젊은내외 뜻맞추어 죽자살자 일을하니
등따스고 배부르며 눈칫밥은 아니더라
시어머니 인생사를 털어놓고 하실때에
한국전쟁 일어나고 빨갱이가 득실할때
빨갱이와 시아버님 휘몰리어 생사불명
살길없는 시어머님 친정곳에 찾아올때
어린자식 삼형제를 앞세우고 찾아오니
친정부모 보기싫다 떠나가라 호통치니
갈곳없는 처량신세 만고고생 하셨다네”
<김점자 “시어머님 사친가”>
시어머니 고 류수향 님도 인생사가 순탄치 못했다. 6.25 전쟁 중에 남편(김점자 시아버지)이 빨갱이로 몰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살길이 막막해진 류수향은 아이들과 함께 친정을 찾았지만 친정 역시 발붙일 곳이 되지 못했다. 당시 살기 어려운 팍팍한 탓에 친정도 딸의 귀향을 반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집안에 들여서 입만 늘어나면 친정도 살기 힘들었기 때문일 터.
친정과 가까운 고천에 터를 잡고 살았지만 남의 품팔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다 이웃에서 얻은 등겨로 밥을 짓고 나물로 겨우 연명했는데 둘째 아들이 그만 대변이 막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이 어떠하랴, 시어머니의 사연을 듣고 고부간에 서로 통곡하며 울었다 한다.
19살에 23살의 이웃 동네 청년 임병융과 결혼한 김점자는 아들 둘, 딸 넷의 6남매를 낳았다. 2남 4녀의 엄마였지만 농사일에 전념하느라 어머니로서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시어머니 손에서 컸고, 학교 일에도 대개 시어머니가 챙겼다고 한다. 임동면 고천리에서 임동면 소재지 장터를 40살에 처음 나왔다고 한다. 그 정도로 바깥 외출을 하지 않았고 일에 몰두했다. 그 덕분에 논밭 터전을 마련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김점자와 류수향의 고부간의 정은 각별하다. 어머니와 딸 사이에도 이보다 더하지 못할 정도이다.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56년 동안 한방에서 동침했다. 김점자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시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방에서 지금도 생활한다.
”살아생전 고부간에 한방에서 잠을잘때
며늘손을 잡으시고 며늘이야 부탁이다.
우리가정 안속이면 의성김씨 착한너를
며늘보지 못하오니 가정사를 속였구나
이제부터 후회말고 원없이도 다했으니
이후부터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아다오
유언같이 말하시며 품안에서 내놓으신
시아버님 사진한장 이사진을 확대하여
당신사후 함께묻어 합장으로 장사해라
하실말씀 다하신가 정신줄을 놓으셨네“
<김점자 “시어머님 사친가”>
시어머니 류수향은 100수를 넘기고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노환에 며느리가 기저귀를 갈았다.
마지막에 병원 가서 사진 찍고 검사했지만 노환을 이기지 못하고 두 아들과 두 며느리가 보는 가운데 눈을 감으셨다.
시어머니 류수향은 며느리 김점자보다 내방가사에 탁월했다. 내방가사도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수했다. 시어머니는 어릴 때 벌써 한글을 깨치고 고향에서 내방가사를 접했다. 류수향의 내방가사는 나이 70세가 넘어서 다시 시작됐다. 아들과 며느리 덕분에 가세가 안정되면서 어릴 때 익혔던 내방가사를 꺼내놓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새벽 일을시작 달뜨도록 일하면서
논도사고 밭도사서 사과나무 심어놓고
식구늘자 재산늘고 행복하게 살아가니
시어머님 일생사를 짓고쓰고 읽으시며
한평생을 글만보고 이웃한번 모르셨네
밤이되면 책보시고 날이새면 손자소녀
업고안고 보살피며 집안살림 도우시고
동지섣달 노달기때 남편뒷글 얻어읽고
고부간에 마주않아 내방가사 읆프면서
인생행복 무엇인가 웃음속에 정이나고
오곡백과 농사지어 등따스고 배부르다“
<김점자 “시어머님 사친가”>
시어머니 류수향은 내방가사 전승 보존회와 연이 닿아 보존회 사무실을 수년간 다니셨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무실을 찾으면서 김점자도 내방가사를 제대로 익히게 된다. 시어머니의 내방가사를 보며 익힌 솜씨로 경창 대회에 출전하게 이른다. 제21회 전국내방가사 경창대회에서 시어머니 류수향은 특별상을, 며느리 김점자는 ’ 효행가‘를 낭송해 최우수상을 받았다. 시어머니는 99살, 며느리는 71살이었다.
김점자는 어릴 때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오빠 등에 업혀 학교를 잠시 다녔으나 집안일을 하느라고 공부를 못했다. 글자를 겨우 익혔던 그녀는 시어머니로부터 내방가사를 배우면서 글을 쓰고 읽었다. 시어머니는 김점자의 글자 선생님이자 내방가사 스승이었다. 고부간에 그렇게 쓰고 읽은 덕분에 경창 대회에서 나란히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이다.
”시어머님 백수년에 내방가사 전국대회
백수어른 화전가를 지으셔서 입선하고
며느리는 낭송대회 최우수상 수상하니
우리집에 겹경사로 이웃분들 인사속에
세상재미 최고여라 아들며늘 딸과사위
친손외손 축하속에 꽃다발을 한아름씩
기념사진 찍어놓고 볼때마다 보약같다.“
<김점자 “시어머님 사친가”>
시어머니 류수향은 <효행가>, <소회가>, <충풍난별가>, <하회경치가>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70을 넘겨 다시 시작한 내방가사는 기록을 통해 시어머니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며느리 김점자에게도 삶의 새로운 활력이 되었다. 시어머니가 붓을 들고 글씨를 쓰는 모습은 자연스럽게 며느리에게 전파되고 며느리도 구구절절 사연을 쏟아부으면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처럼 여겨졌다. 대부분의 내방가사가 친정어머니에게서 딸에게 전수된다.
’ 친정어머니께서 쓰고 읽은 것을 보고 나도 쓰게 됐다’라는 게 내방가사 전승 이유 중 하나이지만 어릴 때 친모를 잃은 김점자는 시어머니를 통해 내방가사를 배웠다. 내방가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를 더 다정다감하게 했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가족의 정이 더 깊어졌다.
“상석위에 차려놓고 애곡하며 울어봐도
삶과죽음 다르오니 아르실까 모르실까
못한일만 생각나니 눈물밖에 또없구려
방문사이 불어오는 미포하는 바람소리
어머님이 오신건가 놀라깨어 문을여니
하늘에는 별만총총 고요하기 적막하다.
남편양반 하는 말이 어머니를 보내주세
어머님의 평소말씀 가지가지 새기면서
웃으면서 살아보세 당신 많이 고생했소”
<김점자 “시어머님 사친가”>
‘시어머니 사친가’ 내방가사는 56년 동안 한방에서 기거하며 함께한 시어머니를 생각하며 끝난다. 말미에 실린 ‘당신 많이 고생했소’ 남편의 무덤덤한 한 마디 위로에 김점자의 고단했던 삶이 모두 녹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