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담댁 김동순 '내방가사 사랑가'
김동순 “저는 회장님 시키는 대로 종만 쳤어요“
‘구담댁’이라 불리는 김동순 어르신은 올해 우리 나이로 87세이다. 어르신은 1937년에 태어나 2주 만에 만주 헤이룽장성 지린성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9세 때 외가인 의성군 신평면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초등학교를 들어갔다가 안동 중앙초등학교로 편입했다. 그리고 안동 사범 병설 중학교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안동 송현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됐다.
25세에 부군 권기하 씨와 결혼한 후 아들과 딸 등 3남매를 두었다. 교사 발령 11년 만인 32세에 교사를 그만두고 안동 송월 타월 대리점을 평생 운영했다.
구담댁은 중학교 입학을 쉽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초등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어머니께서 장사를 시작하면서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해야만 했다. 그녀는 4남매의 맏딸이었다. 하지만 6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공부를 잘하는 딸아이의 재능이 아깝다’라며 어머니를 간곡히 설득한 끝에 병설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사실 어머니는 식료품 장사를 했으나 신문을 보고 일본어, 중국어, 한문까지 알 정도로 당시 여자로서는 신지식인이었다. 그런 영향이었던지 담임 선생의 설득에 끝까지 반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 속에도 딸아이의 공납금 납부를 놓치지 않았다. 다른 데 쓸 돈도 공납금으로 먼저 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장사 하면서 4남매를 키웠으나 아이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면 모두 합격했다. 공부를 시키는 재미가 있던 것이다. 힘은 들어도 자식들이 공부하고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게 어머니의 낙이었던 모양이다.
김동순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됐지만, 당시 교사 월급은 아주 적었고 한꺼번에 지급되지 않아 결혼 생활에서도 가난을 면치 못했다. 안동 송현초등학교에서 교사를 시작해 중앙초등, 진천 초등을 거쳐 청송 진보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하지만 남편이 청송서 안동으로 전근되자 사표를 내고 안동에서 송월타월 가게를 냈다. 당시 아무나 할 수 없는 직업이 교사였지만 부부 교사로 돈을 벌어도 장사하는 어머니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과감히 사표를 내고 당신도 장사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직 교사 답게 그는 수건 장사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목성교 헌책방에서 소설이나 잡지 등을 빌려 열심히 읽었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신문을 읽던 것을 기억삼아 그도 많은 책을 읽어, 글을 쓰고 읽는 게 낯설지 않았다.
구담댁이 내방가사 보존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7년 60세쯤이다. 이선자 회장의 서실에 다니면서 내방가사 모임에 나왔고 창작과 경창에도 뛰어들었다. 내방가사 전승 보존회의 처음을 시작한 초기 회원이다.
”아이고, 저는 종치는 것밖에 하지 않았어요. 회장님이 시켜서 경창 대회 때 종 쳤어요. 시계를 보고 있다가 3분 되면 종을 치고 나중에는 알람이 나와서 3분 되면 누르고 했지요. 회원들이 생각보다 일찍 쳤다, 늦게 쳤다고 혼내고 했는데 그래도 저는 열심히 쳤어요. 내방가사는 여기에 들어와서 썼어요. 이선자 회장이 서실 회장이었어요. 붓글씨 배우러 다녔는데 내방가사를 해보자 해서 참여했지요.“
<김동순 인터뷰 중에서>
그래서 종만 쳤다는 구담댁은 종치기뿐만 아니라 내방가사 창작도 잘했다. 작품집을 2권이나 낼 정도로 많이 썼다. 첫 창작대회 때 구담댁이 쓴 ‘비슬산 화전가’가 최우수상에 올랐다. ‘경북도청 개청가’로도 상을 받았다. ‘경북도청 개청가’는 도청 신도시가 생길 때 경북 도청을 돌아보고 느낌을 가사로 남긴 것이다.
‘경북도청 개청가’는 2016년 3월 새로 개관한 한옥 형태의 새 청사를 노래했다. 사각 형태 건축양식 마다하고 절묘한 한옥 형태에 65만 장 고령기와로 올려 장인 솜씨 빛났다고 노래했다.
”경사로다 경사로다
안동예천 경사로다
이천십륙 삼월십일
새 도청이 열리는날
전국에서 모여오신
만여명의 축하손님
경북도민 두손들어
한맘으로 환영하네
국사경영 바쁜총총
참석하신 대통령님
예천안동 뜻을모아
신청사를 유치한일
화합정신 토대삼아
혁신적인 균형발전
전통문화 현대산업
경북도가 계승하라
간곡하신 축사말씀
명심하여 경청했다.“
<김동순 내방가사 ‘경북도청 개청가’>
”쓰는 걸 배우지 않았어요. 어릴 때 듣기는 들었지요. 우리 어머니가 한양가를 즐겨 읽었어요. 뒤에서 들으면서 ‘엄마 단종 임금이 왜 자살하는데요, 임금은 왜 하는데요? 하면서 울곤 했지요.’ 어머니는 책을 많이 읽었고 한양가를 읽었고 옛날에는 책을 다 민요조로 읽었잖아요, 그 읽는 걸 듣고, 외할머니께서 사돈지를 읽고 해서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김동순 인터뷰 중에서>
구담댁은 안동뿐만 아니라 담양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서도 상을 받았다. ‘과학영농가’와 ‘요양원 방문가’로 장려상을 받았다. 그녀의 ‘고희 기념여행가’는 어린 시절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되고 6학년 때 전쟁이 나고, 4.19와 5.16 등 한국 현대사가 가사 속에 나온다. 고희를 맞은 소꼽친구 8명이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추억을 나눴다.
“내방가사 회원님요
꽃도좋고 잎도좋은
사계절에 으뜸봄날
칠십노구 삭은육신
내방가사 아니라면
오라가라 뉘가할까
비슬산 문화촌애
화전놀음 펼쳐놓고
가사를 읊고짓고
어디한번 흥돋우자
일등기사 관광버스
시동걸어 기다리니
얼른얼른 승차하소
농속의 구긴한복
솔기펴며 다려입어
맵씨를 내보지만
얼굴주름 펼수없네
찰떡같은 말씀으로
간다간다 대답하고”
<김동순 내방가사 “비슬산 화전가“>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경력 덕분인가 김동순은 팔순을 한참 넘긴 할머니지만 컴퓨터를 배웠다. 이메일을 주고 받고 가사 창작도 컴퓨터로 한다. 손으로 쓰는 것보다 컴퓨터로 쓰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고 한다. 쓰다가 잘못되면 곧바로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으니 컴퓨터가 얼마나 편리하느냐 라고 반문한다.
그가 쓴 ‘내방가사 사랑가’는 내방가사 전승보존회원들의 이야기다. 매주 수요일 용상동 사무실에 모여 글을 쓰고 읽는 회원들의 모습을 눈에 선하게 그려냈다. 내방가사가 여성들의 전통문화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후손들에게도 적극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실댁이 무실댁이
개실댁이 사촌댁이
아침일찍 버스타고
사무실로 모여오네
마을이름 택호되고
지은택호 많고많아
조선시대 여기련가
택호불려 지칭하고
택호속에 친가시가
명가예문 숨어있어
호칭하는 음성속에
품위있고 정다워라
안동땅 용상동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내방가사 사무실에
쌓여가는 가사보소“
<김동순 내방가사 ‘내방가사 사랑가”>
김동순은 이 내방가사에서 회원들을 ’여성 선비‘라고 칭한다. 남성 위주의 우리 문학 활동은 보존되고 있지만 여성 문학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늙은이들의 입속에서 사라질까 염려한다.
“목터지게 창을 하는
판소리도 아니고요
시조창도 아니여라
알맞은 음성으로
굽이굽이 넘어가는
절절한 마디마다
감히흉내 누가내랴
빠르지도 느리지도
맑은소리 가늠해서
읊어가는 저목고리
귀중한 문화유산
보이는 건물들은
개축보수 잘한다만
목소리로 전승되는
가사창은 왜모르나
늙은이들 입속에서
사라짐이 안타까워”
<김동순 내방가사 ’내방가사 사랑가‘>
구담댁 김동순은 지난 6월(2023년)에 몸이 좋지 않아 병원 신세를 졌다. 병원에서도 내방가사 보존회 모임에 나갈 생각만 했다고 한다. 매주 수요일이면 내방가사 모임에 가서 가사를 쓰는 회원을 만나고 함께 경창하고 글을 쓰는 게 그리 좋다고 한다. 구담댁은 자신이 글을 짓고 쓰는 것도 좋지만 회원들과 함께 읽으면서 어릴 때, 젊은 시절 추억을 공유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없이 좋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