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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동 호서비 Jul 13. 2024

안동내방가사이야기 15.(끝) 안동은 내방가사의 보고다

내방가사에는 우리 어매, 할매들의 희노애락이 담겼다.

안동은 내방가사의 보고寶庫다.     


‘내방가사’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 때다. 국어국문학 전공과목 가운데 ‘가사 문학론’에서다. 기억을 더듬어 대학 졸업 35년 만에 교재를 들춰봤다. 교재 ‘가사 문학론’에 ‘내방가사’는 이렇게 언급돼 있다.   

   

“선조 때 허난설헌이 공규空閨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양반 가사의 형식을 차용하여 창작한 규원가閨怨歌로부터 시작한 내방가사內房歌辭는 이 시기(영조)에 와서 비로소 영남지방의 부녀자에 의해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이 시작되었다.”      

“반상의 구별 없이 부녀자가 지은 가사를 내방가사, 규방가사, 규중가사, 규중가도, 한국 규방가사, 부녀가사 등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가사는 고려말에 발생해 조선에 들어와서 양반 작자에 의해 창작되면서 양반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가사 문학이 양반 전유물에서 작자층이 양반과 평민, 부녀자 등으로 구성되면서 영조 이후 전 국민이 쓰고 읽는 국민문학으로 발전된다. 현존하는 내방가사도 영·정조 이후 생산된 작품이 많은 것도 이를 반증한다.


내방가사는 조선 후기 여인들, 특히 양반가 여성들의 글짓기다. 당시 글자는 남성의 전유물인 한자와 여성들이 쓰던 언문諺文, 즉 한글로 나눠진다. 양반 집안이지만 여자들은 한자를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여자가 글을 배워서 무엇 하나?’는 당시 풍조였다. 그래서 남성들이 가볍게 여기던 언문을 여성들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한글은 그렇게 여성들이 기거하던 안방, 내방에 자리를 잡게 된다. 여기서 여성들끼리 서로 소통하면서 익힌 문학이 바로 ‘내방가사內房歌辭다. 다음 국어사전에는 내방가사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서술한다.      


내방가사內房歌辭: “조선 시대, 부녀자들이 자신들의 생활과 희로애락을 노래한 가사 작품을 통틀어 이르는 말, 영남지방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도 이와 비슷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내방가사(內房歌辭): 『문학』

“조선 시대에, 부녀자가 짓거나 읊은 가사 작품을 통틀어 이르는 말. 영남지방에서 널리 유행하였으며, 주로 시집에서 지켜야 할 몸가짐과 예절 따위를 내용으로 한 것으로 <계녀가>, <춘유가> 따위가 있다. 작자와 연대를 알 수 없다.” =규방가사.     


내방가사의 작가는 양반가 부녀자이다. 그래서 남성이 아닌 여성들의 전유물로 여긴다.

영남지방의 내방가사는 대부분 친정어머니가 딸에게 물려준다. 이 집안에서 저 집안으로 이뤄지는 양반가 혼사에 따라 내방가사도 집안과 집안으로 이동한다. 그 내용은 시집가서 지켜야 할 몸가짐이나 예절 그리고 자녀 양육 등이다. 시댁 여성들과도 내방가사는 공유된다. 좋은 내용이 있으면 서로 낭송하고 베낀다. 그리고 다시 마을 부녀자들에게 전달되고 발 없는 소문이 천 리를 가듯이 내방가사도 이웃과 이웃을 따라 마을 안에 전달되거나 이웃 마을로 전해진다. 또 새로 창작되거나 덧붙이기도 한다. 결혼 후 생활사와 희로애락喜怒哀樂, 두고 온 친정과 부모, 자녀 이야기 등이 새로 창작된다.

          

내방가사는 단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창작자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이어지는 게 특징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넋두리 식으로 덧붙일 수 있기에 장편 드라마처럼 내용이 다양하고, 등장인물도 한 둘이 아니다. 시부모와 남편, 아이는 기본이요, 친정 부모와 헤어진 형제자매, 일가친척, 이웃 사람들, 모두가 내방가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오륜가라(오륜五倫을 항목별로 짚어 교훈하는 내방가사)1920년, 풍산김씨 설송공파 주손 ⓒ한국국학진흥원

     

현존하는 내방가사는 주로 경북의 사대부가 여성들에 의해 창작, 필사, 낭송의 방법으로 향유되고 유통되면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문학이다. 창작과 필사로 원본을 다시 베끼는 과정이 반복된다. 좋은 내용의 내방가사는 작자뿐만 아니라 여럿이 필사하면서 수많은 글을 재생산하고 유통한다. 같은 제목의 내방가사가 여러 이본을 만들어내는 것도 필사의 전통 덕분이다. 내방가사의 내용은 여성들의 경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어릴 때 부모 밑에서 자랐던 이야기를 비롯하여 결혼 후 시집살이, 아이 키우기, 집안 대소사는 물론이고 마을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화자가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진술하는 텍스트를 ’자기 서사‘라 한다.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은 내방가사에 자신의 이야기, ’자기 서사‘를 담은 것이다. 수많은 여성이 내방가사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서술하고 성찰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여성의 한글 글쓰기는 확산한다. 한자를 통한 글쓰기가 남성들에 의해 가로막히면서 여성들은 언문, 한글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글쓰기는 자기 욕구와 소통의 대상이었고, 편지와 같은 실용문을 통해 한글 글쓰기를 일상화한 여성들은 점차 가사나 소설 등을 창작하기에 이른다. 편지나 가사는 자기 서사의 글쓰기였고, 일상의 구어, 말하기를 바탕으로 자기 서사의 글을 썼다.  

    

시골여자 서른사졍(힘든 시집살이를 하며 젊음을 보냈지만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서러운 심정을 읊음)20세기초, 영천이씨 운곡문중 ⓒ한국국학진흥원

      

하지만 조선 시대 여성의 글은 가족 안에서 허용되었다. 가족이나 친족, 공동체나 지역 범위 안의 여성들 사이에서 유통되었다. 유교 사회는 여성들이 쓴 글조차 가족 공동체 밖으로 나가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대부분 지역 공동체 안에서 유통되었지만, 여성들의 혼인을 통해 안동에서 경주로, 봉화로 혹은 성주에서 안동으로 내방가사가 퍼져 나갔다. 혼인을 통해 들어온 내방가사는 집안이나 이웃 여성들이 다시 베끼면서 안동의 내방가사가 경주로, 성주의 내방가사가 안동으로 유입되기도 했다. 내방가사는 필사본이기에 유통 범위가 상대적으로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남성들의 글은 목판에 글을 새겨 문집을 만들어 유림을 통해 확산했으나 여성들은 필사로 글을 썼기에 많이 전파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베껴 쓰는 게 고작이었던 여성들의 내방가사는 베껴 쓰는 과정에 옮기는 여성이 잘못 쓰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담기에 처음 쓴 원본과 다른 이본이 많은 것도 필사본이라는 특징 때문이다.     


“내방가사는 친정어머니가 허구한 날 썼지요. 직접 쓴 것도 많고 다른 사람의 것을 베껴 썼고요. 저도 시집올 때 어매가 쓴 내방가사를 많이 가져왔고, 처녀 때부터 가사를 어느 정도 쓸 줄 알았지요. 다 어매한테 배운 겁니다. 어매는 또 외할매께 배웠을 거고, 그렇게 물려받았을 겁니다.”<이선자 회장 인터뷰 중에서>     


안동 내방가사 전승보존회 이선자 회장의 말이다. 멀리 조선 시대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근·현대에 와서도 내방가사는 여성들의 전유물이고 여성들의 대물림으로 이어졌다.     


60~70년 대만 하더라도 안동 등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여전히 내방가사가 향유된 것으로 보인다. 종가를 중심으로 종부들이 내방가사를 지었고, 딸아이의 혼사 때 내방가사를 지어 보냈다. 이선자 회장도 어머니로부터 받은 내방가사와 사돈지 등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이 회장이 결혼한 때는 1971년으로, 양반가 혼례 풍습에 따라 내방가사를 통해 시집가서 지켜야 할 ’부녀자의 덕德‘을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곱게 기른 딸아이를 남의 집에 보내면서 가정 교육을 올바르게 가르쳤음을 알리기 위한 수단이 됐으리라 여겨진다.      


이를 반영하듯 초기 <내방가사>에는 ’계녀가誡女歌’류, 즉 ‘여성들을 가르치는 가사’가 많이 창작되었다. 여성들에게 유교 이념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배우기 쉬운 한글, 언문으로 창작된 내방가사가 당시 사회 교화에 이바지한다고 인정받으면서 여성들만의 집단 창작이 허용되기에 이른다.  

   

계여가(여아에게 여성이 지켜야 할 도리와 몸가짐을 알려주는 내방가사)20세기, 능암구씨 백담문중 ⓒ한국국학진흥원

       

‘계녀가’류의 가사가 초기 내방가사의 창작을 촉발하면서 여성들은 자신만의 시각을 담은 다양한 주제의 내방가사를 짓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시각이 담아지면서 가사 내용은 여성의 삶에 대한 탄식과 회고, 가문 자랑, 여행기 등으로 확대되었다. 집안과 가문, 가족에 대한 자부심이 글로 표현됐고, 봄날 꽃놀이를 한 후 ‘화전가’를 썼다. 마을마다 ‘화전가’를 쓰고 여성들끼리 모여 앉아 이를 낭송했다. 또 다른 마을의 ‘화전가’를 구해 읽고 베끼면서 가보지 못한 산천을 글로나마 그려보고 언젠가 방문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또 여성으로서 삶에 대한 회고는 남성과 달리 살아야 하는 사회구조를 한탄하고 이를 비판하는 시각 등을 담아 여성들의 맺힌 한을 글로 풀어보기도 했다.

     

<내방가사>는 16~17세기부터 일부 여성들에 의해 창작되었다. 허난설헌의 ‘규원가’ 등이 있었지만 실물이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실물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내방가사는 1794년 ‘쌍벽가’다. 안동 하회마을 풍산 류씨 화경당의 소장으로 연안 이씨가 그의 아들과 시댁 조카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을 중심으로 가문의 영광을 노래했다.      


상벽가(1794년 정부인 연안 이씨가 지은 쌍벽가를 필사한 내방가사, 쌍벽가는 내방가사의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20세기초,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한국국학진흥원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면서 내방가사는 여성만의 문학 장르로 자리 잡게 된다. 이 시기에 조선은 유교적 이념과 남성 중심주의가 주류를 이룬다. 상류층 여성들이라 해도 남성과 달리 글을 읽거나 쓰는 것이 힘들었다. 특히 교육과 사회참여에 도외시되었다. 남성의 문자인 한자를 배우지 못한 여성들은 배우기 쉬운 언문 즉 훈민정음을 익히면서 자기 생각과 삶을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이후 안동 등 경북 지역에서 내방가사가 집중적으로 창작되었다. 경북 지역은 수양과 실천을 강조하며 보수성이 강한 유교의 중심지였고 남성을 중심으로 연결된 학연과 혼맥이 지역 공동체를 이루었다. 상류층 여성들도 가문과 자녀를 중심으로 문중 안에서 제한적인 활동과 권한이 주어졌을 뿐 사회적으로 소외됐지만 그들의 언어인 언문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글로 표현했다. 경북 지역 양반가 여성들은 대부분 친정어머니로부터 가사를 배웠다. 그리고 혼인을 통해 그 가사를 시댁으로 전파했고, 시댁 친지와 마을 이웃에게 내방가사를 전했다. 또 시댁 여성들이 지은 내방가사를 친정에 전파하는 등 내방가사는 혼맥을 통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전해지면서 경북만의 독특한 여성 문화를 탄생시켰다.      


20세기의 내방가사는 이전의 가사와 내용이 매우 다르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내방가사는 여성의 자전적인 글쓰기를 넘어 개화와 일제 제국주의, 민족의 현실, 독립 염원 등 사회 변화에 따른 여성들의 시각이 실린다.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한 남편을 따라 함께 만주 땅을 밟아야 한 여성들, 망명 생활에 따른 고단한 일상, 망명을 떠난 친인척을 그리워하는 고향 친족의 마음, 식민지 지배 속에 살아남아야 하는 백성의 삶 등이 가사에 고스란히 녹아난다.


출처:한국국학진흥원 기획 '안동문화 100선'.  이호영. 『어와 벗님네들』. 안동내방가사이야기. 민속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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