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흐르는강물처럼 Jul 13. 2024

토끼굴 - 확증편향 - 불통

면적 22만 km2의 한반도가 남북으로 쪼개져 으르렁거리고 또 남한에서는 좌우로 갈라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 서로 물고 뜯고 있습니다. 또 좌우로 갈라진 가운데 그 속에서 또 서로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러시아 인형 마트로시카가 연상되기도 하고 까면 깔수록 더 눈물 뽑는 매운 양파 같기도 합니다.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로 국가와 사회발전을 위한 투쟁과 갈등이라면 좋겠습니다만 밑도 끝도 없이 서로에게 상처만 남는 대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불통의 입으로 소통을 외친다고 뱀 같은 두 갈래 사악한 혀가 감추어지겠습니까. 어쩌면 좋습니까.


평행선으로 이어지던 양대 진영의 궤적이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론의 주체가 되는 국민들의 의식이 여론정치를 통해 재선삼선사선을 노리는 정치인들의 '음모'를 더욱 센 음모를 만들어내게 하는 건 아닌지 크게 걱정이 됩니다. 표를 구하는 정치인들은 점점 더 '황희정승'이 되어, "유권자들이여 그대들의 의견은 무조건 반드시 기필코 옳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의견 수호자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 다음에도 ~ 아시죠." 이런 것 아닙니까. 왜 국민들의 의견이 갈라질까요. 국민들이 소통하고 통합하면 정치인들은 덜 싸울 텐데요.




미국의 소설가 루이스 캐럴의 소설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꿈속에서 토끼를 쫓다가 토끼굴에 들어가 이상한 모험을 하게 됩니다. 토끼굴에 들어간 앨리스는 미로 같은 굴속을 돌아다니느라 바깥세상으로 나오지를 못합니다. 전에는 영화, 의류, 여행 등 인터넷 사이트 회원으로 가입하려면 운영자 측에서 가입희망자의 나이 직업 취미 가입동기 등을 묻곤 했습니다. 이제는 전처럼 상세한 걸 덜 묻는 것 같습니다. 가입자의 웹 서핑 내용으로 다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사용자들이 끊임없이 플랫폼에 머무르도록 유도합니다. 마치 앨리스가 토끼굴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사용자들이 스스로 굴에 들어가 자발적으로 나오지 않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이런 현상을 <Rabbit Hole Effect 토끼굴 효과>라고 합니다.


조사에 의하면, 뉴스를 접하는 방법이 연령대별로 다소 차이가 납니다. 젊은 층은 주로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유튜브나 인터넷신문으로, 60대 이후는 주로 예전처럼 '9시 뉴스'나 종이신문을 이용합니다. 차이는 종류가 아니라 방식입니다. 방송 뉴스는 주어지는 뉴스를 수동적으로 듣는 방식이라면 소셜미디어는 내가 보고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보게 해줍니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편식하면 영양불균형이 되듯이 내가 원하는 것만 보고 들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불균형이 생기고 굴절과 왜곡된 의견을 갖게 됩니다. 종전에도 언론기관마다 특유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독자층을 확보와 그에 따른 광고 수입을 얻기 위해 언론사 특유의 시각이 더 특유화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입에 맞는 음식을 찾아서 단골이 되듯이 자기 의견과 성향에 맞는 언론을 찾습니다. 식당은 걷든 차를 타든 공간이동이 필요하고, '9시 뉴스'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한눈팔면 뉴스를 놓치지만, 인터넷으로 접하는 뉴스는 24시간 영업 중입니다. 누워서도 볼 수 있고 심지어는 걸어가면서도 볼 수 있는 '토끼굴'에 들어가면 가스라이팅과 세뇌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기독교인이 교회에 모여서 불교도가 절에 모여 더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결정에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려는 심리를 '확증편향 confirmation bias'이라고 합니다. 나의 의견, 나의 결정과 다르면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조건 거부합니다. 국회 내의 표결에서 정당의 당론을 따르지 않으면 '배신자 색출'이라는 시퍼런 날이 선 단어를 사용해 가면서 확증편향이 되기를 강요합니다. 정당의 목적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정권을 획득하는 것이고 획득한 권력을 누리는 것입니다. 권력을 싫어할 이 누가 있겠습니까. 첫째는 그렇다 치고 둘째나 셋째의 목적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라는 진심을 최소한이라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을 마음껏 쓰고 남으면 기부하겠다는 심리와 같습니다. 돈. 얼마나 많아야 마음껏 쓸 수 있을까요. 아무리 많아도 늘 부족한 게 돈이듯이 권력 욕심도 끝이 없나 봅니다.


이런 정치인들의 속내가 확증편향으로 고착된 국민들의 의식과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지지자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 심지어는 거짓소문과 선동이 난무하게 됩니다. 자신의 확증편향을 지지 또는 입증해 줄 정책과 정치인을 만나면 서로가 서로의 토끼굴과 앨리스가 되어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원제 The Death of the Democracy, 민주정의 죽음)>를 쓴 미국 뉴욕시립대 역사학과 벤저민 카터 헷 교수는 히틀러가 정권을 획득한 이유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나치당의 히틀러에게 총리를 맡긴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욕망, 가치를 저버리고 세(勢) 불리기에만 여념 없었던 자본계급, 붕괴한 사법시스템이 낳은 참사였다고 진단했습니다.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종말은 갈수록 음모론과 비합리성에 치우치는 문화 속에서, 나치가 엘리트들의 복잡한 이기주의와 결합한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정치에 대한 식견을 가진 '엘리트'들이 넘쳐납니다. 미용실에서 할머니들이, 경로당에서는 할아버지들께서도 저마다의 주장과 평론으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르십니다.




인터넷 강국이라는 우리나라는 '빛의 속도'로 통하는 인터넷 망을 자랑합니다. 빠른 소통, 온라인에서의 전천후적인 만남으로 시간과 공간, 속도와 회수의 제약을 극복했습니다. 아날로그 일본, 디지털 대한민국으로 두 나라를 비교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녹록지 않습니다. 그리스는 민주정으로 고대국가이면서도 상당한 문화 수준을 갖춘 나라였습니다. 헬레니즘으로 서양 정신문화의 원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민주주의는 같은 계급 안에서의 평등이었고 여자와 노예는 거기에서 제외된 사회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갈등의 종류도 많습니다.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빈부 격차, 노사 갈등, 정치 갈등. 의료 사태 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더 나은 미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인지 고대국가로의 회귀인지 사뭇 의아합니다. 토끼굴에 빠진 듯 헤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불통이 되어버린 국민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처음'의 정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