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정과목 책을 던져주던 팀장님, 그리고 내가 커리큘럼에 집착하는 이유
제가 전략기획 팀에 배정된 이유는 아무래도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이유였지 않을까 싶어요. 새로 생긴 분당사무실의 살림살이와 회장님의 보좌업무를 담당할 전략기획 팀원이 필요했는데 경제학을 전공했다고 하니 나름 잘 맞아보였나봐요. 당시 법인 물적 분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던 전략기획팀은 저에겐 거대하고 차가운 숫자의 요새와 같았습니다. 기업의 분할, 합병, 계열사 매각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팀이었는데 그렇게 어려운 일을 담당하는 팀원들이 정말 대단해 보이고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랑은 달리 우월해보이기까지 했어요. 이제 막 입사한 저는 그 속에서 늘 스스로가 별볼일 없고 작고 초라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지요.
저는 사회과학대학 경제학을 전공했어요. 경영대학의 경제학하고는 학문의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는 경제를 사회 시스템을 보고, 시장·정부·제도·불평등·고용·성장 같은 거시/정책 이슈까지 폭넓게 다룹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나?"같은 설명·분석(이론+실증) 비중이 큽니다.
경영대학의 경제학은 비즈니스/경영경제의 성격을 띕니다.
경제학을 기업/산업 의사결정 도구로 쓰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가격을 어떻게 정할까?", "시장구조에서 전략은?", "수요예측·데이터로 매출을 어떻게 올릴까?" 같은 응용·의사결정 비중이 큽니다.
전자는 노동, 공공/재정, 국제무역·국제금융, 산업조직(산업경제), 경제성장/발전, 금융경제, 게임이론, 정책 평가 등 정부/정책, 사회문제, 제도 분석 위주의 과목들을 공부하고 후자는 미시·거시·계량도 배우지만, 경영 필수가 함께 묶이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면 회계, 재무, 마케팅, 경영전략, 생산/운영, 조직행동, 경영통계 등을 공부하죠.
그런데 저는 뼛속까지 문과에요. 수포자였거든요. 제가 학교다닐때는 다행히도(?) 경제수학이 필수과목이 아니였어서 경제수학도 공부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제 다음 학년부터 전공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어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연히 회계원리같은 어려워 보이는 과목도 선택하지 않았어서 공부해본 적이 없었고요.
그런데 제가 회사에 입사를 해보니 그런 실무적인 지식을 기본으로 장착했어야 했더라구요. 특히 제가 있던 팀에서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할 기본 지식이었어요. 기업에서 다루는 실무 회계와 생소한 계정과목들은 이론 중심의 경제학을 공부했던 저에게는 읽을 수 없는 고대 문자와도 같았습니다.
그때 팀장님이 제게 하신 행동은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제가 분개와 계정과목도 모르는걸 알고 나서 저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셨어요. 계정과목에 대한 책 한 권을 툭 던져주며 "이거라도 읽고 공부 좀 해"라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제게 절실했던 건 세련된 지식 서적이 아니라, 회계의 근간인 ‘회계원리’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었습니다. 본질을 모른 채 겉핥기식 책장을 넘기는 시간은 고통이었고,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한 저에게 돌아온 건 무시 섞인 시선과 무력감이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던져진 단편적인 정보는 지식이 아니라 상처가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절의 막막함은 제가 교육 사업을 시작하며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무작정 조종기부터 쥐여주고 "왜 못 날리느냐"고 다그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게 단편적인 계정과목 책을 던져주던 팀장님의 모습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토스의 교육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단계별 빌드업'을 지향합니다. 드론의 물리적 원리, 디지털 리터러시의 기초, 그리고 안전에 대한 약속을 차근차근 다진 후에야 비로소 비행 기술을 얹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가장 정교한 교육적 계단을 설계하는 것. 그것이 제가 상처받았던 그 시절의 나에게, 그리고 미래를 배울 우리 아이들에게 보내는 답장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배움의 과정에서 제가 느꼈던 무력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신, 한 계단씩 올라가며 "아,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성취감의 가치를 기획해주고 싶습니다. 전략기획팀에서 회계원리 몰라 무시당하던 오소라는 이제, 아이들의 성장 가능성을 기획하는 교육가로서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커리큘럼을 다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