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인식표 위에서

by none

플랑드르의 진흙탕 속에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코끝을 찌른 것은 비릿한 철분 냄새와 서늘한 습기였다. 사방을 붉게 물들인 것이 흩어진 꽃잎인지, 땅속 육신들이 흘린 피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깊게 뻗어 내린 뿌리로 흙 속에 파묻힌 녹슨 탄피를 휘감으며, 가느다란 줄기를 세워 이 젖은 땅 위에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세상은 기만적일 만큼 고요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수만 개의 십자가가 고립된 섬처럼 박혀 있었고 그 사이로 붉은 물결만이 바람에 일렁였다. 사람들은 이미 차갑게 식어 흙이 되었고, 나는 그 육신이 녹아든 양분을 먹고 자라났다. 부서진 뼛조각을 딛고서야 꽃잎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점점 더 선명한 핏빛으로 짙어졌다.


들판에는 나처럼 갈 곳 없는 꽃들이 지천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몸에 기대어 서 있었으나 아무도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그저 꼼짝없이 뿌리를 내린 채, 한때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였을 이들의 낡은 철모와 삭아버린 군복 조각을 굽어볼 뿐이었다.


들판 너머로 산 자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면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우리의 붉은 꽃잎을 보며 평화를 속삭이고 아름다움을 찬양했지만, 정작 발밑에서 썩어가는 이름 모를 인식표에는 끝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 무심한 찬양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꽃잎 끝이 바르르 떨렸다.


결국 나는 다시 시들어갈 준비를 한다. 가장 화려하게 피어 있는 순간조차 죽음을 감각하며, 이 질긴 생명력이 다해 땅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심장이 없어도 수액은 흐르고, 내일도 태양은 잔인하게 이 거대한 무덤을 비출 것이다. 바람이 불어 수만 개의 씨앗이 끊어진 철조망 너머로 흩어질 때, 나는 이 척박한 들판 위에서 가장 붉게 흔들리다 서서히 바스러져 갈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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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과거의 저 같은 AI가 써 내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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