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여러 겹의 시간
왕궁리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이곳은 아직 이름보다 흙이 먼저였다.
줄자를 펴고, 기준점을 잡고,
땅 위에 선을 그었다.
그 선 안으로 들어가면
과거가 현재의 일이 되었다.
삽이 들어갈 때마다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했다.
이곳은 이미 수백 년을 견뎌냈고,
우리는 잠시 허락받아 내려가는 중이다.
현장은 언제나 사람으로 완성된다.
그 중심에는 학예사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늘 한 박자 늦게 말씀하셨다.
이미 답이 보이는 순간에도
쉽게 단정하지 않았다.
“조금 더 봅시다.”
“이건 서두를 이유가 없어요.”
그 말들은
발굴 기술이기 이전에
삶의 태도처럼 들렸다.
나는 그 옆에서 배웠다.
발견보다 중요한 것이 기록이라는 것,
흥분보다 중요한 것이 책임이라는 것을.
연구원 동료들과의 시간은
왕궁리의 또 다른 층위였다.
같은 도면 위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같은 유구 앞에서
같은 침묵을 나누었다.
비 오는 날엔 흙이 무거웠고,
여름엔 그림자 하나가 소중했으며,
겨울엔 손끝 감각으로
토질을 읽어야 했다.
그래도 우리는 웃었다.
점심시간의 농담,
조사 후의 허탈한 웃음,
무언의 공감.
그 시절의 왕궁리는
유적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일상이었다.
봄이 오면
현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벚꽃이 필 무렵,
트렌치 가장자리에 떨어진 꽃잎은
이상하게도 유구를 가리지 않았다.
왕궁리 5층 석탑이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무너졌던 시간과
다시 세워진 시간이
한 몸처럼 겹쳐진 모습.
나는 그 탑을 볼 때마다
우리가 파내는 구조물이
결국은 또 다른 시간의 바탕이 되리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꽃님이.
언제부터였는지
현장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온 작은 존재.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누군가의 발치에 앉고,
또 다른 누군가를 따라가던 강아지.
꽃님이는
유적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시간을 함께 살았다.
힘든 날에도
꽃님이는 늘 같은 표정이었다.
그게 현장을 버티게 해주었다.
시간은 흘렀다.
나는 다른 회사로 옮겼고,
결혼을 했고,
아이들이 생겼다.
왕궁리는 정비되었다.
트렌치는 사라지고,
설명판이 생겼다.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이들과 이곳을 걷는다.
아이들은
기둥자리를 밟고 뛰고,
수로를 따라 손가락으로 물길을 그린다.
“여기서 뭐 했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려고,
땅을 조금 빌려 썼어.”
아이들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괜찮다.
이곳은
이해의 장소가 아니라
겹침의 장소니까.
지금의 왕궁리는
더 이상 발굴 현장이 아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여전히
조사 중이다.
학예사 선생님의 목소리,
동료들의 웃음,
벚꽃 아래의 흙냄새,
꽃님의 체온.
그리고 지금,
아이들의 발자국.
왕궁리는
내가 발굴한 유적이 아니라
내 인생의 여러 시기가
한 자리에 쌓인 장소다.
그래서 나는 매해
벚꽃이 피면 다시 온다.
과거를 확인하러가 아니라,
그 시간을
조심스럽게 다시 밟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