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명품 시계, 나의 명품 가방. 우리가 살아낸 시간들
지난 12월 1일, 홈쇼핑에서 시계 광고가 나오던 날이었다. 남편이 TV를 보다가 무심한 듯 말했다.
"나도 명품 시계 한 번 차봤으면 좋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올 한 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낸 사람인데, 그 정도 선물은 괜찮지 않을까. 남편은 우리 집 사정이 좋지 않아 새벽 알바, 주말 알바까지 뛰며 바쁘게 지냈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또 말했다.
"나 49년 인생 살면서 명품 시계 차본 적이 없어."
그 말이 유난히 슬프게 들렸다. 남편은 결혼 전 자동차 판금 일을 했다. 쇠를 자르고 붙이고, 용접 불꽃이 튀는 작업. 그래서 남편의 손은 늘 거칠고 검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과 상처들. 남편은 그 손을 부끄러워했다. 내가 보기엔 세상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해온 흔적이었지만, 그는 늘 손을 숨기기 바빴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남편이 안아보려고 손을 내밀자 친정엄마가 말했다.
"손 좀 씻고 와서 안아. 깨끗한 손으로 안아야지."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손이 얼마나 열심히 일한 손인지,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품 시계를 찬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름과 쇳가루, 용접 불꽃 속에서 시계란 금방 망가지는 물건일 뿐이었다. 결혼식 때도 시계 예물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편은 정장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인데, 평생 작업복만 입고 살아왔다. 시어머니가 "선물"이라고 건네던 것도 늘 다른 사람이 입다 남은 옷들이었다. 언제나 '작업복으로 입으라'는 말과 함께였다. 제대로 된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남편의 말이, 내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지금 남편은 더 이상 자동차 공업소에서 일하지 않는다. 손도 예전보다는 훨씬 깨끗해졌다. 여전히 거칠지만, 이제는 시계를 망가뜨릴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홈쇼핑 자동 주문 버튼을 눌렀다.
얼마 전, 남편의 첫 명품 시계가 집에 도착했다.
문득 떠올랐다. 오래전, 방송작가 시절의 나. 나는 방송생활 10년 동안 휴가 한 번 없이 일만 하며 살았다. 후배가 말했다.
"선배는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일을 정말 사랑하시나 봐요."
말하고 싶었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못 가는 거지.'
프리랜서의 삶은 일을 남에게 맡기는 일조차 걱정이고, 또 맡아줄 사람을 구하는 것조차 일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늘 '언젠가'였고, 사실은 못 갔던 것이다. 그렇게 쉼 없이 일하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선물을 해주고 싶다.'
방송생활 10년이 지나던 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나는 생애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일본이었다. 그 여행은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고, 기념으로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명품 가방을 하나 구입했다.
과한 사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10년 동안 정말 잘 살아냈다고, 고생했다고."
그렇게 주었던 선물은 지금도 내 곁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2025년 한 해 잘 견뎌온 나에게 주는 조그마한 위로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건 어떨까? ⓒ 이효진
이제 또다시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그때의 선물이 '10년치 보상'이었다면, 이번에는 좀 더 소박하게, 작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나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 2025년 한 해 잘 견뎌온 나에게 주는 조그만 위로로.
다이어리를 펼쳐 지나온 날짜들을 천천히 훑어본다.
'그래, 이 정도면 참 잘 버텼다.'
그 마음으로 작은 선물을 고른다. 그리고 이렇게 지나가는 2025년을 곱고 단단하게 보내려 한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