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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Dec 22. 2024

두 사람의 마음

331일 차.

어지간해선 TV를 잘 보지 않습니다. 원래 그다지 좋아하는 편도 아니지만, 예전에 비해 유익하지 못한 프로그램들로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어떤 채널을 틀어도 거의 마찬가지의 느낌입니다. 왜 저런 걸 보며 사람들은 희열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을 봐도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그런 것들 뿐입니다.


공공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나가려다 우연히 딱 그런 프로그램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평소 같았다면 두 번 망설이지 않고 TV를 꺼 버렸을 겁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혐오하는 프로그램들 중의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시청하게 된 겁니다.


특별히 연예인이라는 부류의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그러진 않습니다. 다만 화려한 외양 뒤의 쓸쓸하고 공허한 내면을 도외시한 채 마냥 그들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해할 수 없을 뿐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저 역시도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긴 합니다.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나마 숱한 연예인들 중에서 가장 꾸밈없고 진솔해 보여 호감이 간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가 본 방송에선 두 남녀가 출연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연배라는 것만 알았지, 나이가 저보다 한 살이 더 많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적은 나이는 아니구나, 그런데도 저렇게도 우아하고 멋지군나, 하는 생각을 하며 보던 중에  드디어 남자가 여자에게 좋아한다며 고백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며칠 전 인터넷 기사글을 통해서 먼저 알게 된 바로 그 장면이었습니다. 당연히 그것 때문에 제가 그 프로그램을 끝까지 보게 되었고요.


올해 모두 우리 나이로 쉰넷인 그들 중 남자는 같은 남자인 제가 봐도 참 멋진 사람입니다. 그를 보면서 항상 늙어도 저렇게 늙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그리 화려한 미모는 아니나, 단아하고 분위기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로선 아무리 제 관심사 밖에 있는 연예인이라고 해도 딱히 싫어할 만한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마침 TV에선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하더군요. 이미 기사글을 통해 결말을 알고 있어서인지 저는 두 사람의 감정의 흐름이나 표정을 유심히 보며 감정을 이입했습니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마른침으로 적셔가며 어렵게 말을 꺼낸 남자,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이미 표정에선 모든 걸 짐작한 듯한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이 더 크게 요동치고 있는 게 느껴졌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마음을 받아줬다면 최소한 남자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적어도 이 모든 장면을 숨 죽이며 지켜보는 저 역시 마음 한편이 훈훈해질 것 같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될 리는 없는 것입니다. 고백을 듣고 심각해져 버린 여자가 내내 보여주는 그 마음의 결이 제 마음에 더 아프게 와닿았습니다.


어쩌면 누구라도 짐작하겠지만, 제게는 여자가 남자의 고백을 받아들이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거절해야 남자가 덜 상처받고 지금의 이 좋은 관계를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으니 아마도 금세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된 게 아닐까 싶더군요.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두 사람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 일을 계기로 그 좋은 친구 관계마저 깨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오래 교류했으니까요. 한편으로는 잠시 마음이 설레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또 그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감정인지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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