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작이 Dec 22. 2024

누군가의 꿈

#13.

네거리 경찰서 근처를 지날 때였다. 문득 아빠에게 지갑을 가져다주던 며칠 전 그때와 시간대가 비슷한 것 같았다. 성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그렇게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도 뭐가 있나 싶어서 기웃거리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어! 그럼 그때 내가 잘못 본 거란 말이야? 아냐, 엄마도 얘기했잖아?’

성희는 혼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큰 길이 끝나자마자 맞닥뜨려진 기다란 골목길이 다른 날보다 더없이 길어 보였다.

긴 골목길을 빠져나와 어느덧 집 앞에 이르렀다. 아래쪽에 덩그러니 구멍이 뚫린 채 너덜거리고 있는 철제 대문이 여전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소리에 부엌에 있던 엄마가 밖으로 나오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성희는 댓돌 위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대청마루에 올라섰다.

며칠 사이 집안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우선 아빠의 귀가 시간이 빨라졌다. 게다가 예전처럼 코가 빨개지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일찍 저녁상을 치우고 성희는 자신의 방으로 건너가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담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에 눈이 부셔서인지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창밖에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어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치 그건 누군가가 큰 커튼을 펄럭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잠깐 그렇게 창밖이 어두워지더니 다시 환한 달빛이 비쳐 들었다. 그 짧은 사이에 성희는 커다란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얼른 일어나 창문을 열어 봤지만 누군가가 뿜어대는 담배 연기만 스멀스멀 새어 들어올 뿐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눈만 멀뚱멀뚱하다 성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사방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얼마나 바람이 거센지 가벼운 것들은 모조리 하늘로 휘말려 올라갈 기세였다. 몸무게가 고작 50kg 정도 나갈까 말까 하는 성희는 그 바람에 휩쓸리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접착제로 발바닥을 땅에 붙여 놓은 것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어깨를 넘어 허리 중간까지 늘어뜨려진 긴 머리카락이 춤을 추듯 휘날리고 있어서 성희는 좀처럼 온통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도 눈을 부릅뜬 채 앞만 주시했다. 뭔가가 보일 듯 말 듯.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있었다. 물론 그게 정확히 어떤 물체인지는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폭풍뿐만이 아니었다. 우산을 들고 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정도로 비가 사방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마치 비 한 방울 한 방울이 쏜살같이 날아드는 화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고나 할까?

뭔가가 앞에서 일렁이는 것 같더니 한순간에 발아래 시야가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성희는 자신이 절벽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이 정도 바람이라면 언제라도 성희는 저 끝도 없이 펼쳐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세상에 아무리 깊은 산이나 계곡도 지금 서 있는 저 낭떠러지만 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성희는 조금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한 발만 움직이면 곧장 아래로 추락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뒤로 물러서려 해도 좀처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성희의 머리 위로 괴상한 생물체 하나가 나타났다. 뭔가 끽끽하는 소리를 내고 커다란 두 날개를 펄럭이며 성희의 머리 위를 한참 맴돌았다. 집 근처에서 봤었던 바로 그 기린이라는 새였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그런데 성희는 어쩐지 이곳이 어딘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성희는, 마치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듯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아름드리 솟은 온갖 기이한 나무들과 군데군데 보이는 험준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 중에서 조금은 크기가 작은 또 하나의 절벽이 멀리 아래에 펼쳐져 있고, 그 절벽에선 우렁찬 소리를 내는 폭포가 있었다.

그 폭포 앞에 자신처럼 꼿꼿이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었다. 처음엔 까만 점처럼 보이다가 점점 모습이 커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다지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와 이마에 잡힌 서너 가닥의 주름살이 눈에 띄었다. 분위기로 보면 영락없이 사십 대는 족히 넘은 사람으로 보였다. 다소 의외인 건 지나칠 정도로 앳된 얼굴이었다는 점이다.

‘어? 누구지? 많이 본 사람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한 건 며칠 전 성희에게 나타났었던 그 노인은 아니란 것이다. 조금만 기억을 떠올려 보면 금세 이름 석 자를 입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낯익은 이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사람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고 있으려니 한참을 그렇게 노려보던 그가 유유히 사라졌다. 마치 바로 너였구나 하는 듯 경멸에 찬 눈빛을 던지고 사라지는 것 같아 기분이 으스스했다.


정체불명의 사내가 사라지자마자 머리 위로 다시 기린이 날아갔다. 천년을 산다는, 어떤 생명체도 해치는 법이 없다는, 모든 짐승들의 우두머리라는 그 기린 말이다. 도대체 왜 저렇게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지 궁금했다.

성희는 작고 가냘픈 자신의 체격이 어느새 커져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허리께를 더듬던 긴 머리카락도 더는 성희의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끝도 없어 보이는 벼랑이 저 멀리 버티고 있고 뒤로는 약간 낮은 폭포가 거센 물보라를 일으키며 온 천지를 뒤흔들어 놓는다. 조금 전까지 서 있던 그 누군가는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성희는 이제 아무도 없는 그곳에 그렇게 서 있었다. 아직도 저렇게 하늘을 비행하는 기린만 있을 뿐이었다.

얼마 후 길이가 오 미터나 되는 기린이 성희의 뒤쪽에 사뿐히 내려앉아 등을 돌리고 있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기라도 한 듯 성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기린의 등에 올라탔다. 기린은 상공을 몇 바퀴 돌더니 빠른 속도로 아래로 내려갔다. 폭포가 있는 바로 그곳까지 내려간 기린은 성희를 내려주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며 울부짖었다. 기린이 절벽을 거슬러 올라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그때껏 내리퍼붓던 비와 폭풍이 거짓말처럼 그쳤다.


때 문득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들릴 듯 말 듯 약하게 울리기 시작한 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커졌고 또 어느새 다시 처음처럼 약해지고 있었다. 마치 밀림에서 위기에 빠진 어떤 동물이 자신의 동족을 울부짖으며 부르는 소리처럼 알 수 없는 그 소리의 울림이 온 가슴을 다 뒤집어 놓는 듯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