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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Dec 24. 2024

누군가의 꿈

#15.

바람이 그새 더 차가워졌다. 처소로 돌아가려 발길을 돌리려던 주지는 사위가 갑자기 더 어두워지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주지는 경내를 뒤덮고 있던 검은 그림자를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웬만하면 그 어떤 일에도 마음의 흔들림이 없던 그였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못한 채 마냥 그렇게 서서 그림자의 실체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하나의 형체가 눈앞에 그려졌다. 사슴의 몸통에 긴 꼬리, 어찌 보면 말처럼 생긴 듯도 하고, 오색의 찬란한 빛으로 둘러싸인 몸통과 튼튼하고 큰 두 날개와 비늘, 그리고 머리에 달린 외뿔…….

‘아니, 저건 기린 아닌가?’

좌측 어깨를 비스듬히 걸치고 있는 가사 자락을 움켜 쥔 주지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경내를 돌아다니던 몇몇 비구들은 놀라는 기색도 없었고 그렇다고 하늘을 올려다보지도 않았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주지는 자신의 눈에만 기린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참을 그렇게 머리 위를 날아다니던 기린은 마치 거짓말처럼 대웅전 뒤로 사라졌다. 그곳은 부처의 뼈와 사리를 안치해 놓은 금강계단이 위치한 곳이었다. 수계식을 행하는 그곳은 사찰 내에선 가장 의미 있고 유서 깊은 곳 중의 하나였다. 주지는 금강계단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대웅전을 끼고돌아 나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요즘 사람들의 옷차림은 아니었어도 행색이 허름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연로해 보이는 사람인가 싶다가도, 이제 갓 예순 조금 넘긴 주지 자신에 비하면 생명의 힘이 지나칠 정도로 넘쳐 나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가르쳤던 전전임 주지 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머리 뒤로 비치던 그때의 바로 그런 후광이, 자신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그 노인에게서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뭐랄까, 그 후광과는 차원이 다른 그 어떤 느낌이 강렬하게 전해졌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헛것을 본 것일 수도 있다. 그저 무턱대고 심란한 마음이 그런 허황된 영상을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늘 사람의 마음이 허하면 헛것을 보게 되니 마음을 다잡으며 살라고 신도들에게 말하던 그였다. 요즘 들어 부쩍 마음이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모양인가 싶었다. 주지는 그간의 정진과 인고의 길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잠시 일었다.

현실일까, 아니면 꿈속일까 가늠하고 있는 사이 노인은 주지의 바로 코앞까지 와 있었다. 한 발만 내딛으면 옷자락이라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까지 근접했을 때 주지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이 분은 내가 머리로 판단할 수 있는 분이 아니구나!’

주지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언제부터 이 땅에 살아왔고 대략 어떤 일들을 했는지 그 행적을, 마음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이 노인의 지나온 과거사를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놀라운 것은, 어느새 거짓말처럼 주지의 머릿속에,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그것들이 하나의 영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지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변화에 자신을 내맡겼다. 노인의 기운이 이미 천 년은 훌쩍 넘어서까지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그제야 비로소 번듯한 사찰이 지어지던 그때,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짐승이 보였다. 그 짐승은 적어도 하늘을 나는 데 있어서는 조금의 거침도 없었다. 새라고 하기엔 날개가 지나치게 컸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저런 몸으로 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몸집이 비대했다. 그럼에도 날개만 펄럭이면 단숨에 천 리를 날아갈 듯 보였다.

유유히 하늘을 날던 짐승이 저 먼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 이내 웬 젊은이 하나가 성큼성큼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성군이나 영웅이 탄생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짐승이라 했으니 분명 젊은이는 보통 사람은 아닐 터였다. 뭔가를 이야기하는 듯한 젊은이, 그러고 보니 그 젊은이의 미소를 어디에선가 본 것도 같았다. 한참 동안이나 젊은이는 세월의 흔적도 비껴가는 듯했다. 그의 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스러져 가고 또 그만큼 많은 새 생명들이 이 세상에 나왔다. 그러다 그들 역시 그렇게 가 버리고 또 다른 생명들은 자신이 갈 차례를 기다리고……. 수많은 세월이 흘렀을 터였다. 이젠 젊은이의 미간에도 어느새 서너 줄의 주름이 잡혀가고 있었다.


영상이 끊어지자마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이도 심란해 보이는구려!”

어쩐지 동굴 안 어디선가 서서히 퍼져 나오는 울림처럼 들리는 노인의 목소리, 염화미소라는 경지가 이런 것일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마치 몇 년은 알고 지내 온 사람처럼, 긴 시간을 뛰어넘으며 수많은 말들을 나눈 것처럼 여겨졌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 노인에겐 이름이 무엇인지 혹은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하는 것들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그런 걸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결례를 넘어서서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여겨지기까지 했다. 적어도 상식적인 선에선 그만큼의 세월을 건너온 이는 분명히 없을 게 틀림없었다.

“저어, 어디서 오신 분이신지 감히 여쭤 보아 되겠는지요?”

노인은 그저 잔잔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방금 그대가 본 그대로요.”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도 이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벌써 주지는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노인이 어떤 말을 해도 추호의 의심도 하지 못하리라.


한참 동안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주지는 조금도 불편하다거나 혼란스러운 감정들은 생기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몇 가지 문제로 골치 꽤나 썩었던 그간의 일들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주지는 왜 이 사찰을 누대로 지켜 온 연못의 물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지, 또 왜 물의 색깔이 검게 변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대가 고민하는 그 문제는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오.”

주지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사뭇 부끄러움이 앞섰다. 그 많은 승려들과 그보다 더 많은 신도들을 이끌어 온 주지였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노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느끼면서 주지는 그제야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천천히 합장을 했다. 마치 생전의 스승을 다시 마주한 듯한 표정으로…….

“며칠 안으로 이 사찰 내에 어수선한 일이 생길 것이오. 그러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그대가 걱정하는 그 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얻게 될 것이오.”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성큼 대웅전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와 함께 한 그 오랜 역사가 무색할 만큼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참, 그때가 되면 꼭 한 차례 다비를 치러야 할 것이외다.”

순간 하늘에서 어떤 명령이라도 내려지는 듯 노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주지는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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