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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Sep 30. 2023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우리 민족

001: 김훈의 『하얼빈』을 읽고……

누군가가 얼마 전 대구 오페라하우스에서 있었던 뮤지컬 "영웅"을 보고 나서 없던 애국심이 마구 솟아나는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하얼빈』이라는 소설도 그동안 사느라 바빠 미처 돌보지 못했던 어딘가에는 남아 있었을 '애국심'이 비집고 올라와야 할 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책을 읽은 후의 첫 느낌은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번만큼 부끄럽게 느껴진 경우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의사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습니다. 경천동지 할 만한 그런 거사에 대해, 어쩌면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거사가 당장에 조국에 독립을 가져오지는 못할지언정 작은 밑거름이라도 되길 바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의 거사가 있던 날은 1909년 10월 26일, 그런데 불과 10개월 만인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경술국치)이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그의 바람대로 자신의 거사가 대한독립의 작은 주춧돌이라도 되었다면 어떻게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나라를 고스란히 일본제국주의에게 갖다 바칠 수 있었을까요? 과연 이를 두고 흔히 말하는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 대신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었다고만 말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런 일환에서 본다면 삼일만세운동도 너무 늦게 일어나 버린 셈입니다. 그때의 우린 과연 그 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안 의사의 거사가 독립운동의 작은 출발점이라도 되길 바랐다면 삼일만세운동은 9년 후가 아닌 그 이듬해인 1910년에는 일어났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악랄한 일본제국주의의 방해 공작이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우리가 망각하고 만 9년의 시간은 일제의 안 의사 흔적 지우기에 편승한 탓이 아니었을까요?

 

거사가 있은 후 일제는, 국가 혹은 민족의 차원에서 일어난 일(우리 민족에게 큰 아픔과 시련을 준 사람에게 내리는 응징)이 아닌, 사사로운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일로 단정 지었습니다. 즉 이토 히로부미라는 거물급 정치인을 두고 안중근이라는 조선의 정신 나간 청년의 지극한 오해에서 비롯된 살인으로 몰아갔습니다. 당연히 사형 구형은 예견된 것이었고, 일제는 5개월 뒤인 이듬해 3월 26일에 안 의사를 처형했습니다.

제발 시신만은 돌려달라는 두 동생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갖은 핑계를 대며 안 의사의 시신을 내주지 않았고, 결국 지금은 온갖 짐승들이 파헤쳐 어디에 흩어져 있는지도 모를 그의 유해를 북한과 우리나라와 중국이 갖은 노력을 들여도 찾지 못하게 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 정작 죽어 마땅했던(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은 신속히 일본으로 옮겨져 대대적인 국장을 치르는 등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죽어 마땅했던 사람과 개인적인 원한이 아닌 민족의 이름으로 그를 처단한 사람의 말로가 어쩌면 이렇게도 정반대의 길을 걷고 말았을까요? 과연 여기에 모든 것이 을사오적을 위시한 친일파들의 활약 때문이었다고 태연하게 우리는 단정 짓고, 그들을 몰아붙일 수 있을까요?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결국엔 우리 민족이 안중근 의사 흔적 지우기에 편승한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시대가 그렇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치더라도 해방 이후에도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고 난 이후에도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니 잊고 말았던 것이겠습니다. 진실로 그럴 리 없기를 바라지만, 또 어쩌면 잊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서 저는 몹시 부끄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지극히 편협하고 개인적인 견해 몇 가지만 남겨보려 합니다.

첫째, 향가 주석에 대한 최초의 저서로서 한국어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향가 및 이두의 연구>를 저술한 사람은 오쿠라 신페이라는 일본 학자였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소창진평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그의 연구를 보고 각성한 무애 양주동 선생은, 한 민족이 망하는 건 총칼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자신도 향가 연구에 뛰어들고 국어대사전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둘째, 1647년에 간행된 "징비록"은 1695년 일본에 번역되었고, 에도 시대에는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로 두루 읽혔다고 합니다. 이후 현재까지 약 3백 년간 일본에서는 30여 종 이상 발간되었는데, 이는 추정치로 고작 4종 정도 간행되고 만 우리나라의 상황과 너무 대비가 됩니다. 한일합병 이후 일본 역사가들이 본격적으로 징비록을 연구한 것과는 달리 1960년이 되어서야 징비록 첫 한글 번역본이 나왔고, 1970년대에 들어서 류성룡 및 징비록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여 앞날의 환난에 대비해야 한다는 류성룡의 가르침을, 우리나라에서는 외면하고 정작 우리나라를 침범했던 일본에서 더 많이 연구하고 읽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셋째, 일본의 저명한 역사소설가인 진순신은 그의 소설 『청일전쟁』에서, "나는 김옥균이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에 건너와서 이토 히로부미나 이홍장을 만나려고 불철주야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조선에 있을 때 전봉준을 먼저 찾아갔어야 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이, 현실을 바라보는 인식이 왜 이렇게도 다른 것일까요? 그것도 침략자와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만 듭니다.

 

이 대목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떠나기 직전 24살인 아들에게 남긴 말(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지만)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읽는 학문도 필요하지만 듣는 학문도 필요하다. 사람은 살아 있는 책이다. 사람은 살아 있는 책이어야 한다. 서양에 도착하면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 식견을 넓혀라. 그 누구와 만나 그 어떤 문제를 토론하더라도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에는 반드시 겉과 속이 있다. 넓고 깊게 사물의 안과 밖을 통찰할 수 있는 것이 안목이다. 정밀한 관찰은 서양인의 특색이며, 조잡한 관찰은 동양인의 약점이다." 

분명 일본이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건 사실입니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쉽게 넘어갈 문제 또한 아니고요.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는 그들에게 우린 충분히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할 자격이 있지만, 저의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잘못된 역사의 청산이라는 미명 하에 너무 여기에 매달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발전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해도 사과에만 매달려 있는 사이 정작 우리가 앞으로 더 나아갈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우린 일본을 너무 미워할 것만 아니라 그들에게서도 옳은 것은 혹은 배워야 할 만한 것은 충분히 배우는 자세부터 먼저 갖춰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처럼 그저 일본이라는 말만 들으면 치를 떨고 마는 반일 민족감정에만 치우쳐 있다면, 어쩌면 이토 히로부미의 말처럼 넓고 깊게 사물의 안과 밖을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조심스럽게 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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