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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17. 2023

불구덩이가 따로 있나?

021: 미야베 미유키의『화차』를 읽고……

친구 녀석이 저를 찾아온 것은 10년 전쯤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자주 연락하고 만나던 친구였으니 뭐, 그다지 새삼스러운 만남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늘 같이 밥을 먹고 적당히 운동도 하고 책에 대한 이야기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중, 녀석이 안색을 바꾸며 심각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야! 5천만 원만 빌려줄 수 있겠냐?"

5백이야 어찌해 볼 수 있겠지만, 5천이라는 돈은 제가 융통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친하면 친할수록 경계는 분명히 해야 한다는 걸 살아오면서 느껴온 터라 미안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물론 친구 녀석도 안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크게 실망하는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그만한 돈이 나한테 있을 리가 있겠냐? 갑자기 왜 그래?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쓰려고?"

저도 압니다. 너무도 답답한 마음에 말을 꺼내 본 거라는 걸 말입니다. 당연히 제게선 그만한 돈이 나올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녀석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하는 심정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기로 했습니다. 커피를 한 잔 홀짝이며 녀석이 꺼낸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대충 이랬습니다.


녀석은 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교직에 들어섰습니다. 정확한 계기는 녀석도 기억하진 못했지만, 아마도 거절하기 힘든 지인의 끈질긴 권유로 1천만 원짜리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면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나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어. 마이너스를 처음 만들었을 때엔 솔직히 한 푼도 손대지 않았어. 10원도 쓰지 않으면 이자가 나갈 일은 없으니까 대출금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어. 그런데 집에 어떤 일이 있어서 딱 한 번 백만 원을 인출해서 썼었어. 그때부터 시작되었어."      


마치 모든 결심이 한순간에 무너지듯이 자신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이 툭하면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녀석의 마이너스 통장엔 숫자가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불과 2년 안엔가 1천만 원을 다 쓰고 다시 갱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을 때 몇 달 동안 이자만 내곤 하다가 이러다간 안 되겠다 싶더라는 생각이 들던 차에, 은행 직원이 “*** 씨는 직업군이 우수하니까 증액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만…….”이란 말에 두 번 망설임 없이 증액했다고 했습니다. 2년 만에 2천만 원짜리 마이너스 통장을 손에 거머쥔 것입니다. 그 뒤부터는 길게 늘어놓아 봤자 사설일 뿐이겠습니다. 첫 마이너스 통장 개설 시점부터 4년 만에 무보증 신용만으로 가능한 최대치인 5천만 원까지 증액이 되었고, 다 쓴 건 아닐지라도 이미 4천만 원을 훌쩍 넘어선 대출금은 몇 달만 지나면 금세 백 단위를 갈아치우곤 했습니다.


녀석이 정말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구나 하는 걸 느꼈던 때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저 역시 그 심각성이 충분히 느껴질 정도였다.

“언젠가 은행에서 연락이 왔어. 5천만 원이 다 찼다고 해도 매월 이자가 약 30만 원에 불과했었는데, 더 이상 증액이 안 된다면서 지금 당장 전액을 상환하든지 아니면 원리금 균등상환 방식으로 매월 175만 원 정도를 3년 동안 갚아야 한다더라고. 내가 그만한 돈이 있었으면 애초에 마이너스를 그렇게 키웠을 리 없지. 그래서 갈아타게 된 게 제2금융(‘캐피탈’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들, 물론 요즘엔 제4금융에 해당하는 것들 중에서 교묘하게 회사 상호명을 ‘**캐피탈’이라고 바꾼 것들이 있어서 특별히 주의해야 된다-그것들은 보통 이자율이 7~8%대인 1금융에 비해 보통 35% 이상 대에서 최저 이자율을 적용한다-며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이었어."


녀석의 말로는 제2금융은 보통 이자가 20%대, 제3금융(각종 저축은행)은 이자가 25~35% 대인데, 여기에서도 해결이 안 되면 이제 제4금융으로 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녀석이 마이너스 통장의 원리금 균등 상환 방식을 피하려다, 2금융과 그리고 순차적으로 3금융까지 넘어가게 되었는데, 대체로 3금융은 보통 직장인 연봉의 3배 정도까지 대출해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녀석의 경우엔 그 가능액이 1억 2천만 원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런데 기존 대출금인 5천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7천만 원을 한 곳에서 대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천, 이천, 천오백 등의 식으로 여러 군데 분산해서 대출해 준다고 합니다. 각각의 이자율을 적용하면, 그리고 한 번이라도 연체를 하면 경우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고요. 그렇게까지 가는 데에는 불과 2년도 안 걸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만난 4금융, 녀석은 이미 이곳까지 손을 댔다면 그 사람의 재정 상태는 구멍 난 댐과 같은 지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이런 엄청난 빚을 만들게 됐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전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 본 책, 147쪽


작품 속의 주인공이 한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제가 정색을 하고 녀석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지금 총 갚아야 할 대출금이 얼마란 소리야?”

“2억 조금 넘어?”

“뭐, 어떻게 그게 가능해? 그리고 그 많은 돈을 대체 어디에다 쓴 거야?”

“안 믿겠지만 계산해 보니 내가 쓴 돈은 7천만 원도 안 되는 것 같아. 십 년 동안 그 나머지는……, 갈아타는 동안 금액이 늘고 연체되지 않기 위해 제때제때 상환하고 하면서 물어 온 이자라고 생각하면 돼.”

상식적으로 조금도 납득이 되지 않는 얘기였습니다. 쓴 돈은 7천만 원인데 십 년 동안의 그 이자가 두 배가 넘는다는 게 말입니다. 물론 그만큼 금액이 늘어난 데에는 녀석의 잘못도 분명히 있긴 했습니다.


"게다가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는 게 간단하다는 사실도 알아 버린 거죠. 이자도 처음에는 액수가 적어서 별로 많다는 생각도 안 들었답니다. 10만 엔 빌리면 3천 엔 정도니까요. 약 한 달 사이예요. 이걸 잘 기억해 둬야 합니다. 그때는 이자가 별로 비싸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 뒤부터는 수시로 이용하게 됐다-이 부분은 나의 생각이지만 수시로 이용하게 되는 게 아니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게 대출 및 카드 시장이 우리에게 들이댈 수 있는 강력한 비수니까-는 거예요. 쇼핑에서 현금 인출까지 버튼 몇 번 누르는 것으로 다 해결되는 데다 지불이 쉬워지니 소비 감각도 점점 무뎌진 거죠.”  ☞ 본 책, 135쪽


녀석은 하는 수 없이 법무사 사무소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책에서 나온 말처럼 폭력이란 수단을 제외하고는 온갖 방법-거의 수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 종일 전화 걸어대기, 학교에 찾아오기, 집에 찾아오기, 지인에게 연락해서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하기, 어느 정도 시점이 되면 월급 가압류나 동산 압류 절차 돌입하기 등의 방법을 쓰니, 그전에 법무사 사무소를 찾아가라는 지인의 권유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을 동원해서 상환을 독촉하는 업자들 등쌀에 시달리다 보니 마지막으로 선택하게 된 수단이었다고 했습니다.


세키네 씨는 1983년 9월 경에 신용카드를 취득한 이후 일상적인 쇼핑 등에 이용하고 있었습니다만 계획성 없는 카드 사용과 금리에 대한 무지-여기에선 무지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건 무지가 아니라 거의 사기에 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 물론 이 부분들에 대해선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라도 일정한 선을 넘으면 바로 목에 칼이 들어온다는 것. 그런데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일정산 선을 일반인들로선 좀처럼 알 수 없다는 것-등이 겹쳐 1984년 여름부터 서서히 카드 대금 반환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중략)…… 매달 지불할 카드 대금을 막기 위해 사채까지 끌어들여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현재 채권자 30명에 부채 총액이 1천만 엔이 이른 상태입니다. ……(중략)…… 따라서 각 채권자 여러분께서는 세키네 씨의 급박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파산 수속 진행에 협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일부 사채업자들이 지금까지도 빚 독촉을 하는 걸로 알고 있으나 앞으로도 이러한 행위를 계속할 때에는 민사․형사 소송법에 걸리므로 이점 충분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본 책, 31쪽

                     

작품 속 주인공은 개인파산을 신청했지만, 친구 녀석은 공무원 신분이다 보니 개인파산은 안 되고 개인회생만 된다고 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개인파산은 거의 100%에 가까운 채무 소멸 상태를 만들어 주지만, 개인회생은 전체 채무액의 30~60% 정도를 5년 동안 변제하는 방식이라고 했습니다.

“야, 그럼 파산 신청하지, 왜 회생 신청했어?”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냐! 법무사 말로는 파산 신청하려면 사표를 내야 된다고 했어.”

결국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선택하게 된 결과입니다.


물론 위에서 인용한 부분과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개인 파산 및 회생 신청이 들어가는 즉시, 계속해서 빚 독촉을 하면 민사․형사 소송법에 걸리니 중지하라는 요청이 있다는 점은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들은 바로는 제3금융과 제4금융은 채무자를 형사 소송법에 근거하여 고발할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직장이나 신분이 확실한 사람은 그로 인해 직장을 잃게 될 위험도 있습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친구 녀석이 만난 법무사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입니다.

                    

왜 이 책의 제목이 ‘화차’인지 책을 읽고 나서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화차’는 생전에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옮기는 불수레라고 합니다.

작품 속에선 주인공이 다른 사람의 신분을 가로채면서까지 철저하게 다른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눈물겨운 모습이 나옵니다. 뭐, 그렇게까지 하겠나 싶겠지만, 정말이지 법만 없다면 길가는 사람을 위협해서라도 돈을 빼앗고 싶고, 은행이라도 털고 싶은 심정이라며 하소연하던 녀석의 모습이 좀처럼 뇌리에서 잊히질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작품 속의 주인공이 보이는 행동을 그저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마지막으로 녀석이 법무사 사무소를 찾아가기 직전에 최후의 마지노선일지도 모른다며 전화를 한 대출업체 사장이 한 말을 실으며 마칠까 합니다.

“공무원이시라고요? 그럼 딱 까놓고 말씀드리지요. 사장님이 그런 신분이라면 비록 신용 상태가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 이천만 원 정도는 거뜬히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각 업체마다 다르긴 합니다만, 저희 같은 경우엔 그 금액을 다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선은 선이자로 20%인 400만 원을 제외한 1600만 원을 입금해 드립니다. 물론 이 선이자의 정확한 액수는 업체마다 충분히 다를 수 있고요. 1600만 원을 받음과 동시에 사장님은 그다음 날부터 당장 일수로 찍으시면 됩니다.”

“일수로요?"

"예. 보통 일수는 100일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매일 20만 원씩 입금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저희 회사 돈을 쓰시겠습니까?”

실제로 쓰는 돈은 1600만 원이지만 100일까지 갚게 되는 돈은 2400만 원인 셈입니다. 만약 돈을 다 못 갚아 기간이 연장되어 가령 1년 동안 계속 변제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실제로 갚는 금액이 얼마쯤인지는 충분히 계산이 가능하실 것입니다. 2000만 원 빌렸고 실제로는 1600만 원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갚아야 할 돈은 (1년 동안 상환한다고 가정했을 때) 7300만 원입니다. 물론 이에는 연체에 대한 이자율이 적용되지 않았으니 실제로 갚아야 할 돈의 규모는 얼마가 될지 상상조차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화차, 지옥으로 가는 불수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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