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시가 된 풍경 6-<매화나무 아래서>

비에 젖은 필사노트를 말리며

by 자야

<POR REST> 문학 필사 체험을 3일 동안 진행 하게 되었다. 필사할 작품들과 함께 최근 3년 동안 필사해 온 필사노트도 함께 놓아두었다. 필사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좀 더 친근감 있게 작품을 맛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갈 곳도 많고 즐길 것도 많은 요즘, 스피드에 익숙한 사람들이 손글씨로 문장을 옮겨 쓰는 것에 얼마나 흥미를 가질까 싶지만, 그럼에도 최근 몇 년 사이 필사를 바로 할 수 있는 책들까지 다양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AI와 ChatGTB가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인간 내면에 대한 갈망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일상에 쫓기다 보니 날마다 시를 쓰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놓고 있으면 그나마 감을 놓칠 것 같았다. 그래서 택한 나만의 방법이 일기 쓰듯이 시를 필사하는 일이었다.

매일 한 편이나 두 편 정도 시를 읽고 나서 필사를 했다. 시집을 사서 읽으면서 했고, 문예지에 실린 신작 시,

인터넷 서점에서 신간 시집 미리 보기를 찾아서도 했고,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를 찾아서 옮겨 써보기도 했다. 어느 때는 필사한 뒤 짧은 단상을 남기기도 했고, 어느 해는 작가별로 시를 필사해보기도 했다. 한 작가의 작품을 계속 필사하다 보면 그 시인만의 문체와 흐름이 보여서 한 작가의 작품과 경향이 내 안에서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필사하는 동안만은 온전히 내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속이 엉켜 감정 조절이 잘 안 될 때 필사는 나를 가라앉히는 가장 좋은 호흡법이었다.

혼탁한 감정들을 가라앉혀 정신이 맑아지는 '도 닦는' 나만의 방법이기도 했다.


체험 하루를 끝낸 저녁에 비가 내렸다. 다음날 아침에 날이 개어서 아무 생각 없이 부스를 열었는데

아뿔싸! 생각보다 저녁에 많은 비가 왔나 보다 골을 따라 흘러든 빗물에 노트가 몽땅 젖어버렸다.

삼 년 동안의 흔적들이 모두 물을 먹고 퉁퉁 불어 있었다.

물이 줄줄 흐르는 종이를 어떻게 할 수 없어 행사가 끝날 때까지 그냥 그곳에 두었다.

행사를 끝내고 정리해서 가지고 온 책들과 노트는 무게가 배가 되었다. 솜뭉치가 물에 젖으면 무거워진다는 것은 알았지만 종이가 물에 젖어도 이렇게 무거워진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그대로 햇볕에 말리면 오그라지기 때문에 드라이기로 계속 바람을 넣어 말렸다. 그리고는 책으로 눌러놨다가 다시 꺼내 말리기를 거의 보름을 했다. 종이가 거의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노트를 펴보니 온통 분홍탕이 올라와 있다.


매화나무 아래서

하주자


비에 흠뻑 젖은 공책

한 해 동안 옮겨 적은 시편들이

번짐 채색으로 가득해진

물 먹은 종이는

원래 보다 배는 더 무거워져

드라이기로 바람 불어넣지만

쉽게 마르지는 않아

다려도 펴지지 않는 마음처럼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펄럭이며 휘어지는 물결

붉은 꽃이 젖고

나뭇가지 사이 비스듬히 걸린

파란색 집도 물기가 가득

노란 새들은 젖어 날지 못하는

나를 밀고 왔던 문장들

나를 살게 했던 시편들

어서 날아봐

어서 돌아와

파란색 지붕이 있는 아슬한 집으로

번진 색깔들 사이로

조용히 도드라져 보이는 글씨

지금은 먼 곳으로 떠난 시인의 시

*...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매화나무 아래서

오래 말리는 중이다


*허수경 시인 「혼자 가는 먼 집」 중



[떠나보내는 말들] 中, 시와 사람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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