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종소리를 기다리는
햇볕 좋은 봄날,
길 건너 꾸지뽕 밭 쥔장인 수미샘이 산책하다가 들렸다. 양평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는 몸이 안좋아 투병 중이다. 이 숲에 우연히 왔다가 한 눈에 반해 땅을 산 그녀는 자연적인 삶을 살고 싶다며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했다. 그리고 가끔 내려오면 며칠 묵었다 올라가곤 했다.
훤칠한 키에 긴 스웨터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입구로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꼭 수녀님과 닮았다.
창백한 얼굴에 맑은 웃음을 가진 그녀,
피기 시작한 제비꽃과 누운주름잎꽃을 들여다보며 감탄하는 여윈 어깨가 찬 바람에 피는 꽃대처럼 흔들렸다.
밭가를 돌며 꽃들을 들여다보고 들어온 그녀와 차 한잔을 나누었다. 항암 치료 후 완치되었다고 생각해서 관리를 느슨하게 했던 것이 검사 결과 전이가 되었다 한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 앞에서 나는 가슴이 쿵 무너졌다. 자기를 모두 내려 놓고 한걸음씩 고요의 시간으로 들어가듯 병 앞에서 담담한 그녀가 구도자 같았다.
그녀가 흰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정갈한 글씨로 '디키탈리스 씨앗' 이라고 쓰여 있다.
" 양평 집에 심으라고 지인이 준 씨앗인데 그곳은 이제 이사 나올 곳이라서 여기에 심는게 좋은거 같아요.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을테니까. 종처럼 흰 꽃이 핀다고 하니까 맑은 꽃이겠죠?"
우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활짝 피고 있는 목련꽃을 바라보며 오래 앉아 차를 마셨다.
그녀가 주고 간 꽃씨를 심었다. 어서 싹이 트기를, 어서 꽃이 피기를
어느 날 작은 싹이 올라왔는데 비가 계속 오기 시작했다. 장마도 아닌데 끝없는 장마처럼.
봄꽃들은 모두 녹았고 꽃대를 밀어올리는 여름꽃들도 그 습함을 견디지 못하고 짓물렀다.
그녀가 떠나고 한 계절이 지났다
짓무르고 마른 여름을 견딘 잎사귀 하나가
조금씩 몸을 키우더니 겨울 문턱에서 꽃대가 올라온다. 이렇게 추워지는데 꽃망울을 틔우는 꽃
마당가를 돌다 쪼그리고 앉아 오래 들여다본다.
이 세상에는 없는 그녀, 그런데 그 손의 따스함은 이렇게 푸르다
부음
하주자
종처럼 맑은 꽃이래요
키가 크다고 하니까
낮은 꽃들 뒤에 심으면 좋아요
흰 종이에
정갈하게 쓴 꽃 이름
몬스터디키탈리스
솜털 가득한 잎 사이
총총 꽃대 올라오는데
비가 내린다
유독 크게 들리는
징크 지붕의 빗소리
잠결에 여기저기 종을 내걸었다
맑은 종소리 들으러
그녀가 곧 올 것 같아
어제도 비, 오늘도 비
물 먹은 땅 속에서
훅 올라오는 뜨거운 습
녹아내리는 잎
왈칵 물러지는 꽃대
장마도 아닌데
끝나지 않는 비
어느 날, 그녀의 부음을 듣는다
또 한 사람을 떠나보낸다
흰 목련 같은 사람
<떠나보내는 말들> 中 시와사람,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