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을 읽는다』 ㅡ 해설 이승희 시인
『발자국을 읽는다』 하주자 시집
오래된 미래의 시간을 걸어가는
해설 이승희 시인
우리는 아는 것만 알고 있으며, 모르는 것들은 모른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세계는 그가 아는 모든 것들의 총합이 된다. 그러나 시는, 시인은 그렇지 않다. 아는 것을 이어 붙여 모르는 곳으로 가기도 하고, 아는 것 없이도 모르는 곳에 닿기도 한다. 아는 것의 끝에는 모르는 것이 이어져 있지만 모르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 속에서 무수하게 모르는 것을 만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간다. 다 알 수 없는, 해독되지 않는 삶의 모습과 비의秘義들을 수락하고 내면화하면서 끌어안고 살아간다. 익숙하지만 낯선 것이 있고, 오래되었으나 낯선 것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알고 모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가 새롭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흘려보내는 모든 것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 하주자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모든 대상물과 시적 정황들은 그러한 시인의 내면이 만나거나 부딪혀서 발생하는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가득하다.
무엇을 견딘다는 것은 끝내 놓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쥐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변화되는 세계의 흐름을 두 눈을 뜨고 지켜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견딤이 스스로 내적인 변화를 일으켜 세계와 다른 방식으로 만나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만남 혹은 부딪침은 주체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반응하게 되고, 이것이 행복 또는 슬픔의 공유라는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하주자 시인은 이러한 시간의 흐름을 견디면서도 그러한 견딤이 고정되고 무조건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견딤’의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변화의 모습들을 어떻게 내면화하고 끌어안는지를 새로운 소통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견딤’의 자세가 유지되는 것은 시인과 세계의 어긋남 때문이다. 그 어긋남으로부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삶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러한 ‘견딤’이 주체적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단절의 방식이 아니라 내면화하고 때로는 주체화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데에서 그 특징적 세계를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멸실의 시간을 건너가는 발자국
‘멸실’의 사전적 의미는 물품이나 가옥 따위가 그 효용을 상실할 정도로 파괴됨을 뜻한다. 멸실은 어떤 재난적 상황에 의해 갑작스럽게 발생하기도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생기기도 한다. 또한 형태 있는 것들만이 아니라 형태가 없는 마음의 문제에서도 멸실은 생겨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시인의 시 세계에서의 멸실과 폐허는 실제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세계 속에서 변화에 대한 반응과 견딤이라는 시적 태도와 의식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서정시의 보편적 방식인 세계와 나의 동일성은 하주자 시인의 시에서는 동일성과 동시에 세계와의 어긋남과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어긋남으로부터 발생하는 변화와 차이에 극렬한 거부감을 보이기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끌어안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미 변화한 것, 이미 단절된 것 역시도 그것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함으로써 주체적 태도를 유지하는 동시에 세계를 넓혀가는 방식이 되는 셈이다. 한편, 이러한 멸실은 기본적으로 시간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시간은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는 변하고, 우리의 세계도 변한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런 시간의 연속성을 통해 시인이 만나고 찾으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누가 물의 흔적을 이렇듯 잘 포개 놓았나
한 겹도 겹치지 않은
규화목 옹이 흔적이 선명하다
기억 지층마다 돋을새김이다
설레는 고백이거나 기쁨의 무늬
돌이킬 수 없는 저녁 쓸쓸한 그림자의
마음속 파도까지 켜켜이 새겨진
화석 가득한 섬
격렬한 날들이 지나간 퇴적층일수록
선명하다는 파도의 결
용암처럼 뜨거운 화인도
층층 결이 될까
얼마나 깊고 긴 호흡으로 다듬어야
물결자국 선연한 연흔이 되는가
지상에서는 사라졌으나 아직도 뚜렷한
시간을 받아 새긴 경전 한 편
물의 발자국들 저물도록 읽는다
- 「물의 발자국」 전문
시간은 흘러 지나가는 것이라 해도 그 흔적은 고스란히 남는다. 시인은 한 개인이며 하나의 세계라고 할 때 시인에게 시간은 지나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흔적 속에서 자신의 기원을 찾고 되새기려 한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찾기 위함이며, 이어지는 나의 존재성에 관한 확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난 시간을 본다는 것은 지난 것에 대한 얽매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통한 새로운 미래의 세계를 바라보려는 태도로 보아야 한다. “한 겹도 겹치지 않고 스쳐 간 내력/ 규화목 옹이 흔적이 선명하다/ 기억 지층마다 돋을새김이다”처럼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나간 대로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그 자체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격렬한 날들이 지나간 퇴적층일수록/선명하다”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하여 “지상에서는 사라졌으나 아직도 뚜렷한/ 시간을 받아 새긴 경전 한 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시집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시인은 스스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동일자로서, 동시에 과거를 바라보는 타자로서 합쳐지고 분열되며 대상을 바라본다. 하주자 시인에게는 이러한 삶의 현장이 바로 자신의 존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봉창에 어리는 달빛까지 사각사각 갉히던 밤
사령의 누에는 섶에 올랐네
할머니도 고치 속으로 들어앉았네
평생 뽑았던 실은 명주옷 한 벌
뽕잎 갉던 소리 가래 끓던 소리 끊긴 적막이
저녁 어스름처럼 문지방으로 스며들고 있었지
비등점에서 움트던 고요의 한 끝
모든 끝은
끓어 넘친 후에 오고 있었네
지금은 폭염의 시간
거죽의 물기를 모두 끌어모아
생을 완성하는 것이 또 있네
- 「끝물」 부분
겹침과 나뉨으로의 시간
존재로서의 기원을 탐구하는 일은 그것의 너머를 바라보려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미래일 수도 있고 존재의 확장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그런 부분에서 서로 다르지 않으며, 이미 있는 것에서 시작하려 알지 못했던 세계로의 진행을 의미한다. 어쩌면 잊고 지냈던, 어떤 이유로든 잊혀졌던 것들을 새롭게 들춰내고 찾아내는 것이 그것의 실천적 방법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지나고 사라진 것들은 잊혀지고 지금은 없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완성으로 새로운 세계로 시인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끝은/ 끓어 넘친 후에 오고” 있었다는 새로운 인식이 그러하고, “거죽의 물기를 모두 끌어모아// 생을 완성하는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는 존재의 기원이 되는 동시에 미래의 새로운 길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잠긴 발목 뼈끝 시린 날을/ 잘 우려 맑은 차가 되었으니/ 영혼을 잘 기다려 준 것”(「직매화 피다」), “조금 허술하고 흐트러졌으나/ 쭈그려 앉아 쓰다듬고 싶은 곳”(「뒤꼍이 붉다」) 등 많은 시편에서 그러한 성찰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성찰은 역시 또 다른 힘으로 현재를 밀어 알 수 없는 미래 혹은 우리가 모르던 어떤 곳에 닿는 힘이 되기도 한다. “너는 깃들고/ 나는 지나쳐간다/ 꽃은 가장 격렬할 때/ 몸을 던져 나무를 버린다”거나 “다시는 울 수 없으리라는 걸/ 아는 순간/ 말은 물이 되고 물은 기호가 된다”(「오독」)처럼 의미 있는 성찰의 힘으로 현재 너머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날이 저물자
담장 아래 분꽃 흐려지고
장독 옆 감나무 가지도 지워져
어둠 한 덩어리 덩그러니
해 들면 눈 떠지고
때 되면 밥 한술 넘어가고
낮달맨키 앉아 있어도 우째 밤은 날마다 올끄나
잠자듯 가야할건디
잎과 꽃 구별이 없어지고
바다와 하늘 회색으로 허물어지듯
살고 죽는 것을
어느 날 문득으로 말하는 그녀
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낮달 엄마인지
분꽃 딸인지
시든 분꽃 주름 속에
검은 씨앗이 한 웅큼
- 「낮달이 분꽃에게」 전문
“어느 날 문득”이라는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회한이 담겨 있을까. 정말 몇 번의 폐허와 눈물과 태어남이 있어야 이렇게 고요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렇게 고요한 회한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에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지나간 것, 사라진 것 역시 유효기간이 지난 무엇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끌어안는 시선에 따라서 지금의 현재를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살고 죽는 것조차 ‘문득’이라면 그 문득 안에 숨겨진 온갖 것들의 이름과 삶은 지워지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 안에 남아있다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엄마와 딸의 관계처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는 다시 과거가 되어 또 다른 현재로 이어진다는 것. 결국 그렇게 이어진다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음을 “시든 분꽃 주름 속에/ 검은 씨앗이 한 웅큼”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면 시인에게 있어서 과거는 현재를 넘어 새로운 미래와 강력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그렇다가 아니라, 많은 시편에서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구로 자주 사용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의 소환이 두드러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시인이 소환하는 과거는 오늘의 자신과 존재가 상실한 것들을 반추하면서 내면의 힘으로 승화시키려 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시인의 시편들에서 나타나는 과거는 과거만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으며, 현실의 공간과 하나로 연결된다. 이렇게 만난 두 공간은 서로 겹쳐지거나 혹은 각각의 모습으로 존재하면서 새로운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만하다.
구름이 달을 제 안으로 당겨 넣는다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달
잇자국 하나 없는 달
구름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도
달은 구겨지지 않는다
심장에서 울렁거릴 때도
내장을 훑고 지나는 동안에도
부서지지 않은 달
서로의 품속으로 들어갔으나
둥근 몸은 일그러지지 않고
구름의 실핏줄 또한 터지지 않는다
산도와 같은 어둔 길을 잘 빠져나온다
구름 끝자락이 달의 가장자리를
가만히 쓸어 올려준다
빛은 묻히지 않는다
온전한 보름달이다
- 「월식」 부분
이해해야 진심으로 작별할 수 있다
월식은 달의 일부 또는 전체가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시인에게 있어 시간의 흐름도 이같은 현상이 종종 일어난다. 과거와 현재는 서로를 끌어당기고, 끌어안으며 겹쳐졌다가 다시 과거와 현재로 나누어진다. 강력하게 겹치거나 이어져 있으면서도 서로를 상처 내지 않으며, 오히려 겹침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려는 태도에 가까운 시선을 보인다. “서로의 품속으로 들어갔으나// 둥근 몸은 일그러지지 않고// 구름의 실핏줄 또한 터지지 않는다// 산도와 같은 어둔 길을” 잘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자신의 존재성을 과거의 기원으로부터 찾으려는 모습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세계의 어긋남에 대항하는 주체의 동일성을 자신의 방식으로 유지하려는 방법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하주자 시인은 오히려 현재의 삶을 꿰뚫는 예리한 성찰을 할 수 있게 된다. 멸실되어 사라진 것 혹은 과거의 시간 속으로 사라지려는 것들 속에서 저마다의 역사를 읽어 냄으로써 어쩌면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이다’라는 역설의 시학을 펼쳐 보이고 있다. 멸실의 폐허 속에서 존재를 찾는 탐구를 통해 세계가 파괴한 것들을 되살려내고, 지금의 존재와 근원에 대한 의미 있는 발견을 통해 서정적 주체로서의 자신을 세워가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시인의 특별함은 과거의 시간이 이러한 존재성의 확인에만 머물지 않고, 오히려 지나간 과거를 진정으로 과거로 돌려보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비로소 작별할 것들과 작별할 수 있는 것이다.
담장 아래 어제가 수북하다고
속수무책 비가 내린다고
캄캄한 날들이라고
밤새 뒤틀린 손으로 쓴 말이다
어둠 만지작거려 만든 날개는 가볍고 희다
이제 어디든지 하강은 두렵지 않아
마지막을 같이 하는 건 아름다운 일일까
서러운 일일까
함께 늙어가자 네가 말하는 잠깐
사이 참 많은 꿈을 꾸었다
손 흔드는 건 결별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니었다는 듯 훌훌
당도하지 않은 마음까지 반송하는 온통
흰 불면이 분분
하늘이 다 우편함이다
꽃그늘 한 켠 지었다 허물면
그것이 길이다
- 「가볍고 흰」 전문
‘현재’라는 것이 가능할까? 현재는 계속해서 흘러가는 것일 뿐, 멈춰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것이, 사라진 것이 오직 그런 것만일 수 없는 이유다. “담장 아래 어제가 수북하다”, 지금도 끊임없이 지나가는 중이다. “속수무책 비가 내”리듯, “캄캄한 날들”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존재를 가능케 했던 것의 근원은 지금이 아닌 과거에 있고, 또 다른 미래 혹은 또 다른 지금으로 가려는 존재는 과거를 지나가야 한다. 마음으로 놓아주어야 한다. 그것은 그 시간과의 단절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단절이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놓아주는 것은 이어져 있음을 깨달은 자의 내면의 힘이다.
우리는 늘 세계와 조금씩 어긋나 있고, 경우에 따라 그 엇갈림이 심화하기도 한다. 어떻게 나의 동일성을 지켜갈 것인가의 문제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질문일 것이다. 하주자 시인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심연에 자신만의 시선으로 선명하고 아름다운 그늘을 펼친다. 이미 지나간 것이 새로운 미래가 될 수 있다는 발견을 통해 익숙하지만, 새로운 현재성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발견을 통해서 시인은 “손 흔드는 건 결별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니었다는 듯 훌훌/ 당도하지 않은 마음까지 반송하는 온통/ 흰 불면이 분분/ 하늘이 다 우편함이다// 꽃그늘 한 켠 지었다 허물면/ 그것이 길”이라는 놀랍고 아름다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시인의 세계가 더욱 놀라운 것은 시인의 세계를 온전히 서 있게 하는 내면의 힘에서 찾을 수 있다. 대상을 측은한 마음으로 끌어안고 이해하려는 태도, 이를 통해 싸움이나 타협이 아닌 포용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발자국을 읽는다』 지혜, 2025 <해설 전문>
시집 해설을 흔쾌히 맡아주신 이승희 시인께 감사드린다.
이승희 시인은 얼마전 2025년 불교문학상을 수상했다.
독자 한 사람으로서도 너무 기쁘다.
깊은 내면의 감성과 탐구가 우리 시단의 또
하나의 큰 맥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