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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Apr 08. 2024

표상(表象)에서 현상(現象)으로

뜻밖의 잔인함에 대하여

  대표적 상징을 뜻하는 표상(表象)이란 어지러운 얘기다. 흔한 용어도 아닐뿐더러 학문적 영역에서 철학이나 심리학에 관심이 없다면 문어체인 표상이란 단어는 실생활에 통용성이 없는 편이므로 생소한 용어다.

  철학에서는 지각(知覺)함에 따라 의식으로 발현하는 대상 그 자체이거나 혹은 지각의 실루엣을 의미한다. 표상, 추상(Abstract), 그리고 현상(Phenomena) 따위는 인식론의 중요한 개념이다. 말하자면, 표상은 우리가 직접 경험한 현실의 사물이나 사건을 뜻하는데, 이는 우리의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 보다 쉽게 표상을 설명하자면, 어제 오후 비가 오는 창밖의 풍경을 본 적이 있다고 하자면 지금 눈을 감고 어제의 비 내리는 풍경을 기억으로부터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억으로부터 소환해 온 주룩주룩 비가 내리던 지각의 풍경이 바로 표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기억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이러한 표상의 구속에서 제아무리 바둥거린들 벗어날 수 없다.


  추상(抽象)이란 표상들이 여러 겹으로 겹쳐진 집적으로 형성되지만, 실제 감각으로는 인식하기 어려운 사상적 개념이다. 그리하여 추상은 사물이나 사건에서 표상들의 오버랩 (Overlap) 으로 형성된다. 예를 들어, 사랑, 희망, 시간, 미적분 따위 등은 추상적 개념이다. 이 개념들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지만, 개념만으로 이해하여 실생활에서 다룰 수 있다. 대부분은 추상을 헛생각으로 오인하지만, 추상적 개념은 뜬금없이 어디서 불현듯 튀어나온 막연함이 아니기에 절대로 허접하지 않다. 따라서 이 글을 읽고 난 독자들은 표상이 겹쳐진 추상화의 개념을 확실히 정의할 수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아니한다.

<Escher -도마뱀 : 2D에서 3D 그리고 무한회륜>

  놀랍게도 우리의 일상을 분석해 보면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 추론인 표상을 바탕으로 추상으로 사고하며 또 그렇게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명증히 과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닐망정 귀납적으로 충분히 관찰되고 검측이 된 사실이기에 보편타당하다는 것이 인지과학자들의 공통적 견해이다.

  인지언어학을 창시한 조지 레이코프가 언급한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할 때 이미 우리 뇌에서는 코끼리라는 표상의 프레임이 기억으로부터 소환되어 추상으로 활성화된다. 그래서 표상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을 사고한다는 것, 즉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언어라는 매개를 포함한 감각기관을 통하여 표상을 인식하고, 또 의식하진 못하지만 각자의 표상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인지과학적으로 코끼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강요한다면,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무작정 거부한들 중첩된 표상을 거부할 여지를 상실하고야 만다.

  이에 반하여 현상이란 인식 또는 경험의 대상으로서 우리가 인지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는 표상과 추상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현상은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사실을 모두 포함하며, 주관적 경험은 개인의 인식과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즉, 하나의 표상이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 다르게 인식될 수 있지만, 그 표상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현상의 일부로 해석함이 보편타당하다. 예를 들어, 신기루는 육안으로 흔히 볼 수 있는 허상이 출현된 현상이지 추상이 아니며 실제로 경험한 표상은 더욱 아니다.


  세 개념의 차이와 관계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표상은 특정 대상을 인식하거나 표현하는 구체적인 방식에 가까운 반면, 추상은 개별적 대상을 넘어선 일반화된 개념을 말하고, 현상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경험이 가능한 반면, 추상은 이 경험에서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추렴하는 과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래서 논문의 초록 (Abstract)  뜬구름 잡는 얘기로 통한다. 그 예시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어 생략!)


표상: "언젠가 본 적이 있던 구름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고, 그것을 다시 떠올린다."

추상: "구름의 개별적 형태가 아닌, 구름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본질을 생각한다."

현상: "뜬구름의 본질을 생각하며 지금 하늘을 보고 구름의 운동 형태를 관찰하며 그 데이터를 기록한다."


  상대방이 느닷없이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코끼리라는 표상을 호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계된 바탕의 프레임을 의심하고 진지하게 의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것이 지각의 실루엣이라는 표상과 추상의 인지 프레임에 갇히지 않는 현명한 방법이다. 거대한 질문, 의미 있는 답변, 미방의 등차, 역제곱의 법칙, 승수효과, 사랑의 테마, 증오할 자유 따위의 추상적 헛소리는 설계자의 의도일 뿐 실존의 차원에서는 모가지를 흐르는 막걸리 한 잔에 비길 바가 없다. 인간이기에 속고 또 속이며 살아가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순간 바른 판단의 존재의식을 지닌다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현상의 실체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바다에서 인간이 그립다는 의미는 잔인하게 고독하다는 자명한 증거. 어제의 그리움은 유유히 표상(表象)으로 흘러갔건만, 오늘은 또 어떤 모질고 아픈 기억들이 당신의 영혼을 야멸차게 할퀴며 현상(現象)으로 지나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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