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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위의 노래 Aug 15. 2021

데칼코마니 :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최인훈의 “태풍”을 읽고

바람이 분다. 물결이 일렁이고 나뭇잎이 스산히 흔들린다. 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단단히 뿌리를 내린 나무가 휘청이고 거세게 흔들리는 작은 식물들은 서로를 할퀸다. 영원할 것 같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하늘은 티 없이 맑고, 제 자리를 지킨 나무는 그 어느 때보다 우직하게, 비록 상처투성이더라도, 제 자리를 지킨다.


최인훈의 소설 “태풍”은 오토메나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근대적 주체가 자아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여정을 다룬다. 세상의 진실 중 오직 절반만을 알고, 자신이 아는 것이 전체라고 굳게 믿고 살아온 이가 세상의 이면을 알게 되었을 때 입는 정신적 상처. 그 상처가 비록 흉터로서 한 평생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길지언정 주체는 그 상처를 매개로 최초의 주체적인 자아의 확장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정신적 성숙을 바탕으로 확립된 자아 정체성은 이제 그 주체로 하여금 앞으로 어떤 태풍이 다가와도 그가 휘청거릴지언정 다시는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 준다.


작중 오토메나크의 자아 정체성 확립 과정은 아이세노딘에서 만난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촉발되어 우연히 발견한 비밀 창고에서 심화되고, 궁극적으로는 현지 여성과의 사랑에 의해 완성된다. 그런데 유년 시절에 그저 그의 아버지와 주변인들이 친나파유 계의 사람들이었기에 그가 나파유를 추종하는 길로 빠졌듯, 아이세노딘에서 발견한 세상의 나머지 진실 또한 외부로부터 그에게 일방향적으로 전달된 것에 불과하다. 예컨대, 오토메나크는 그저 ‘또 다른 나침 반’을 건네받은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오토메나크의 사랑이다.


항상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던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가 개척한 길이 ‘사랑’이었다. 그것도 전시에 처벌을 불사하고 그는 현지 여성 아만다와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한다. 작중 오토메나크가 아만다와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원래 사랑이라는 것이 그러하듯, 그 지점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오로지 하나뿐인 ‘너와 나’의 사랑에서 이제 그는 처음으로 타자와 동등하고 수평적인 관계에서 교류한다. 그리고 인생의 나침반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이 항상 상명하달 식으로 행동하고 사고하던 그는 이제 주체적으로 삶을 설계하기 시작한다. 카르노스 송환 이후 아만다와의 미래를 그리는 오토메나크는 작품 초반의 나파유 문학과 나파유 정신에 심취해 있던 오토메나크와는 일견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역시 세월의 태풍은 다시 한번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오토메나크는 카르노스 송환 여정에서 난파되어 무인도에 조난당하게 된다. 그 섬에서 그가 어떻게 탈출했는지, 탈출 이후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자세히 기술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인도 이후의 삶이 오토메나크에게 더 이상 그를 흔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토메나크의 영혼 — 그가 주체적으로 확립한 자아 정체성 — 은 더 이상 그의 육체 — 외부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감각과 지각 — 에 귀속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작가는 과감하게 무인도에서 탈출하는 과정과 그 이후 30년의 세월을 생략하고 바로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오토메나크로 그 조명을 비춘다. 그런데 가정을 꾸린 오토메나크 곁에는 그의 아내가 아닌 의붓딸로서 아만다가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본디 오토메나크가 사랑한 아만다는 카르노스의 정부였으며 끝내 그와 혼인을 맺었고, 오토메나크는 여성 포로 중 한 명과 결혼하였다고 언급된다. 그러나 이를 삶의 또 다른 비극, 격동하는 정치사에서 사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사연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본인의 삶의 주체로 비로소 거듭난 오토메나크는 오롯한 자기 자신의 사랑을 위해 아직 미성숙했던 때의, 물론 그 진심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을 스스로 극복한 것이다.


“그 얼굴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토록, 거의 미친 듯하던 그 사랑이 다른 사람을 겨냥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그렇다. 괜한 것을 가지고 그 마음고생을 하다니. 그녀는 반생의 미망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를 보고 있는 얼굴과, 그 섬의 낮과 밤의 풀섭 위에서, 하늘과 별을 바탕 삼아 올려다본 얼굴의 기억은 빈틈없이 같았기 때문에.”(p.497)

본 작품의 배경이 태평양 전쟁의 한가운데 놓인 일본군의 처지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나, 작가는 ‘나파유’, ‘아키로마’, ‘아키나’ 등의 애너그램으로 교묘하게 직접적인 서술은 피한다. 그 이유는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문제의식인 자아 정체성에 대한 고뇌가 ‘1940년대 식민 치하의 한국인’에서만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되려, 작중 오토메나크가 제국주의의 본질을 아이세노딘에서 깨달았듯, 그것은 인류 보편적인 것이다.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에서 본인이 미약한 톱니바퀴 하나로 전락했음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고통, 그리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항상 진행되어 왔다. 작가가 실제 지명과 인명을 활용하지 않고 새로운 이름들을 창조한 것은 현실 정치적 문제 등을 회피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자아 정체성에 대한 고뇌와 성찰이 전 인류에서 나타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바람이 형상화된 상징일 것이다.


본작의 주인공 오토메나크는 길을 잃은 영혼이었다. 한 평생 남이 맞추어준 나침반을 손에 쥐고 달려온 그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태풍은 나침반을 그의 손으로부터 떨어뜨린다. 멈추지 않는 바람은 아예 그 나침반을 산산조각 낸다. 하지만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지면 해가 뜨는 것처럼 태풍은 목적이나 의도를 가진 인위적 힘이 아니다. 태풍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마주하는 시대적 흐름 또한 마찬가지이다.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역사적, 시대적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대가 이끄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태초에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해준 것도 타인이요, 이제 그 길을 틀렸다고 하는 것도 타인이다.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던 ‘나’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외부로부터 부정당한다. 그때 한 자아가 겪는 고통과 좌절은 누구의 책임일까.


‘나’라는 존재는 나의 시대적 배경, 공간적 위치, 주변 인물들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작품 초반의 오토메나크는 사유하지 않는 존재가 그저 그의 주위 환경을 거울로 비추어 낸 존재, 하나의 ‘데칼코마니’가 되어버린 모습을 형상화한다. 하지만 오토메나크는 끝내 스스로 자아를 확립하며 인간이 가지는 주체성 또한 보여준다. 사유하는 개인은 그의 주변 환경을 양분으로 삼되 그것에 귀속되지 않는다. 그는 번데기를 거쳐 탈피하는 나비처럼, 오직 자기 자신만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존재이다. 데칼코마니에서 시작했지만 스스로 나비가 되는 길을 찾아낸 오토메나크의 이야기는 인류에게 사랑의 위대함과 더불어 우리 모두가 근대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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