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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두 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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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Feb 14. 2023

이별

14.07.31. 나의 동거인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 설움에 몸을 태우는 우리에게.


  까마귀 떼가 섬을 어둡게 뒤덮어버리기 시작한 작년 겨울.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잿더미처럼 둘러싸인 그 순간. 겨우 나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한 칸의 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당신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십 대의 어느 날부터 서른을 넘긴 지금까지도, 내가 느끼는 고통의 상당 부분은 바라는 것과 충족되지 못한 현실사이의 괴리감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남몰래 서른의 나를 내려다볼 때마다, 세월에 서운하고 젊음에 미안하고 지금의 내게 연민을 느껴요. 그런데 연민을 이렇게 정의하더군요. '불구에 대해 느끼는 슬픔을 먹어 내 자긍심을 배 불리는 서글픈 감정.'


  아마 당신이 이곳에 없었더라면 난 그 연민에 잡혀 먹혀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그동안에 나를 쓸모없는 사람으로 느끼게 만든 말들이 많았거든요.


  당신이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을 안 뒤로,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월만이 사람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지금 내가 느끼는 것들이 당신과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면 당신은 내게 세월의 도구로서 잠깐 머무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당신도 이미 아시는 대로 저는 상대방을 칭찬하거나 기분 좋게 하는 말을 잘하지 못해요. 뭔가... 부끄럽거든요, 그런 행동이 말이죠.

  다만 내가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덤덤한 표정의 편지 안에 당신과의 이별이 우리의 긍지의 날이 되기를 바라는 내 진심을 담는 것밖엔 없을 듯합니다.     

  잘 가시오. 그리고 많이 버시오.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괴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긍지의 날>  中 - 시인 김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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