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속된다

by 구키

12월의 마지막 날 퇴근이 가까워진 무렵, 창 밖에는 이미 어둠이 내렸다. 몇 시간 후면 올해가 가고, 새해가 밝을 참이었다. 1년이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다니. 한 것도 별로 없는데 나이 먹을수록 시간의 흐름엔 가속도가 붙는 것 같았다.


별일 없어도 새해 전날은 어쩐지 ‘칼퇴’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강정훈 실장이 잠시 부사장에게 보고를 간 사이에 이현주 과장은 남편과의 저녁 데이트가 있다며 일찌감치 퇴근을 해버렸고, 김윤철 과장은 차가 막히기 전에 퇴근해야 한다며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박하은도 친구들과의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중이었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연우는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하고 아마도 TV에서 방영해 주는 특선 영화나 연말 시상식 같은 것들을 돌려보다가 12시가 되면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 타종 행사를 지켜보게 될 터였다. 그다음에는 뉴스에서 새해를 맞은 세계 각국의 모습들을 보여주겠지. 예를 들면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새해로 넘어가는 시점에 카운트다운을 하고,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위로 불꽃이 터지고, 명동성당에서 송년미사가 생중계되고, 새해 첫 순간 태어난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매년 보는 장면들인데도 볼 때마다 괜히 새삼스러운 건 왜일까.


빠르게 하고 있던 작업을 마무리 중에 있는데 '삐빅' 소리와 함께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친구 영진이었다.

‘연우연우! 전에 창업한다고 했던 우리 학교 선배 있잖아. 그 선배가 자기 회사에서 마케팅 쪽으로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데 한번 만나볼래? 너 전에 회사 옮기고 싶다고 했잖아. 같이 합류해 있는 팀원 구성들도 다 괜찮다고 하는데 혹시 고려해 볼 생각 있나 해서.'

오. 이것은 새로운 기회인 건가.

‘아 정말?? 나야 좋지! 그 선배님이 좋으신 날짜 몇 개 알려주면 맞춰 볼게!’

‘그래, 선배랑 얘기해 보고 다시 연락 줄게. 참. 새해 복 많이 받아라.^^’

‘ㅇㅇ 너도! 새해에도 건강하고 복 많이 받아! 조만간 함 뭉치자고~~!’


서둘러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과 다이어리를 가방에 넣고 나오는 연우의 발걸음에 설레임이 묻어났다. 이번 기회가 연우와 맞는 기회일지, 아닐지는 모른다. 그래도 좋다. 연우는 이 순간의 설레임을 즐기고 싶었다. 올해도 몇 시간 남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는 오피스 빌딩들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로 가득했다.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저마다의 길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연우는 생각했다. 삶은 나를 또 어디로 데려갈까. 사실 올해를 시작하던 시점에 연우가 바랬던 일들 중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원했던 이직에 성공하지 못했고, 회사 생활은 더 퍽퍽해졌으며, 좋은 짝을 만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연우가 원했던 것들이 이루어지고 아니고 와 상관없이. 살아있는 한 연우가 해야 하는 건, 그저 순간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좋은 결과가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음을 준비하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낙심해하는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또 다른 선택들을 내려가며 희망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이 삶을 살아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용기임을 그녀는 깨달아가고 있었다.


미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연우는 믿고 싶었다. 아니 믿기로 결심했다. 앞으로의 선택들과 수많은 우연들의 조합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는 없지만, 매 순간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선택했다면 설사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맞닥뜨리더라도 결국은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자신 안에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연우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것이다. 무엇이 와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힘, 그것만으로도 연우의 삶은 이미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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