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팀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12월을 보내고 있었다. 강정훈 실장은 승진 후 더욱 열정적으로 일을 하다 못해 다른 부서의 일까지 가져오는 과욕을 부렸다. 여전히 일의 우선순위는 수시로 뒤죽박죽이었고 어떤 일들은 굳이 이 시점에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를 들면 연초에 고객들에게 발송될 연하장의 색깔과 폰트를 바꾸는데 과도하게 많은 시간을 쓰고 컨펌했던 것을 무한반복적으로 뒤집으면서 다른 굵직한 업무의 데드라인을 놓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연우는 이력서를 업데이트해서 헤드헌터들이 보는 사이트에 올리고 매일같이 채용공고를 들여다보았다. 대놓고 말을 하지는 않지만 팀의 과반수는 아마 이직을 시도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연봉, 직책, 회사의 네임벨류 같은 것들을 눈여겨보았던 예전과 달리 연우가 가장 신경 쓰게 된 것은 조직 문화였다. 이미 연우는 운 좋게도 몇 번의 이직을 통해 업계에서 제일 좋은 회사들을 몇 개 다녀본 상태였다. 아무리 좋은 직장도 조직문화가 너무 맞지 않으면 막상 들어가서 또 힘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자꾸만 선택을 하는 데 있어 조심스러워졌다. 돈도 돈이지만 그곳에서 보내는 매일매일이 행복한지가 연우에게는 더 중요했다. 배울 점이 많은 상사 밑에서 성장하는 경험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관심 가는 회사의 재직자들이 회사에 대한 평을 올려놓은 웹사이트에 수시로 들어가 보았다. 사실 그 조직에 들어가 보기 전에는 조직문화가 어떤지, 상사가 어떤지, 팀원들은 어떤지 완벽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우는 최대한 리스크를 피하고 싶었다. 이것은 마치 나이 먹고 이성을 만나는 일과 비슷했다. 몇 번의 연애를 해보았고 이제는 결혼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어릴 때처럼 열정 하나로 관계에 뛰어들기엔 많은 생각이 든다는 걸. 그렇다고 돈만 보고 맺는 관계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적당히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의 연봉, 적당히 적성에 맞는 있는 일, 적당한 조직문화가 모두 갖추어진 직장을 찾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확률과 같았다. ‘적당히’ 혹은 ‘평범하게’라고 하는 기준이 원래 제일 도달하기 힘든 것 아닌가. 마음에 드는 기회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연우의 이직 시도가 별 소득이 없는 가운데 회사는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도 삐걱거릴지언정 쓸데없이 책임감 강하고 성실한 몇몇 사람들이 누군가가 낸 구멍을 메꾸어가는 형태로 톱니바퀴를 쉴 새 없이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올해도 어김없이 연우가 솔로로 보내야 하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그래도 이런 때 다행히도 만날 이가 있었으니 연우의 몇 안 되는 싱글이자 솔로 친구인 영진이었다. 대학 때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 영진은 게임회사에 다니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종종 소개팅도 하고 남자를 만나보고자 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영진은 완전히 그쪽에 대한 관심을 꺼버린 듯했다. 35살을 넘기면 난임이라는 설에 그때까지만 해도 초조한 마음이 컸지만 이미 그 나이를 훌쩍 넘기고 보니 자연스럽게 결혼에도 관심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소개팅이 들어온들 귀찮다고 했다. 나가봤자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올 확률은 거의 없고 설사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해도 상대가 아닐 가능성이 크며, 따라서 시간 낭비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주말 내내 혼자 있어도 혼자만의 취미 생활로 바쁘고 그다지 외롭지 않다고 했다. 주말을 혼자 보내는 게 외로웠던 연우는 그런 성격의 영진이 부러웠다. 연우가 영진을 부럽게 생각한 건 또 있었다. 영진의 회사가 꽤 괜찮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영진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그랬다. 게다가 영진의 회사에서 만든 게임이 중국에서 대박이 나서 직원들에 대한 처우도 꽤 괜찮은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이브날, 인파로 북적거리는 홍대입구의 어느 맥주집에서 연우와 영진은 잔을 부딪혔다.
“짜안~메리크리스마스~~”
“야 이런 날 너라도 있으니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모르겠다. 너 없었으면.. 흑흑..”
우는 시늉을 하는 연우에게 영진은 어디서 구한 것인지 사슴뿔 같은 머리띠를 건넸다.
“야 이거 써봐. 루돌프 머리띠. 내 것도 있어. 이건 산타모자 머리띠.”
“낼 모래 마흔인데 뭘 애들처럼 이런 걸 써”
연우는 타박을 주면서도 신이 나서 머리띠를 썼다. 이렇게 있으니 다시 대학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때가 좋았는데. 왜 항상 과거는 미화되는 걸까.
“나 요즘 이직 준비 중이야. 너네 회사 같은 데 가고 싶다, 야. 네 얘기 들으니까 회사가 너무 괜찮은데, 나 같은 사람이 갈 자리는 없겠지?”
“글쎄~, 나도 네가 오면 좋지! 점심시간에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산책도 하고!”
생각만 해도 너무 좋은데 자신이 하는 일과 영진의 회사에서 하는 일 중에 접점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근데 영진아, 내가 요즘 드는 생각이 말이야, 꿈을 이루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는 걸까?”
“글쎄? 난 일단 그렇게 거창한 꿈이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냥 난 어떻게 하다 보니 이 길로 왔는지라. 근데 난 뭐 거창한 게 아니라도 적당히 만족하고 살아. 내 것이 아닌 걸 안달복달한다고 그게 내 것이 되진 않잖아.”
영진은 본래 욕심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다. 되려 소박한 것들에도 쉽게 만족하는 축복받은 성품이랄까. 연우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수준의 회사에 들어가서 어느 정도 수준의 동네에 살고 어느 정도 수준의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기를 희망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위기감에 있는 힘껏 살았다.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사는 영진의 삶도 연우가 보기에 꽤 괜찮아 보였다. 누가 뭐래도 자기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것이 아닌가.
“하긴. 해보는 데까지 해보지만 안 되는 걸 안달복달한다고 내 것이 되는 건 아니지. 근데 보통 사람들은 해보는 데까지 해보다가 욕심이 생기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좌절하는데. 네가 참 대단해 보인다.”
“뭐 그냥.. 난 원래 큰 욕심은 없어. 흐흐.”
“근데, 내가 회사에서 VIP고객들 많이 접하잖아. 아마 그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예를 들면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이런 곳에 오지는 않을 거야. 더 좋은 데 가겠지? 그래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행복감이 그 사람들이 느낄 행복감에 비해 덜할 것 같지는 않아. 어디서 무얼 하느냐는 다를 수 있지만 행복의 정도를 꼭 돈이 있어서 더 크게 느끼는 건 아닌 것 같단 생각도 들더라고. 그 말인즉슨, 성공하면 행복해지고, 성공하지 못하면 불행해진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
“그러엄~ 우리 지금 행복하잖아! 크리스마스이브에 함께 할 친구도 있고!”
“맞아! 그런 의미에서 짜안~~”
영진과 술잔을 부딪히던 그날 그 순간 연우는 분명 행복했다. 비록 남자친구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길 바랐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바라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하지만 그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정말 불행한 인생으로 결론지어버리는 게 맞을까? 인생은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불행해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원하던 대학에 합격 또는 원하던 직장에 취업하여 승진하는 흔히들 말하는 큰 성공의 경험뿐 아니라 남자친구와 처음 손을 잡았을 때, 친구들과의 여행지에서 함께 모여 바닷가에서 노을을 바라보던 순간, 긴 하루를 마치고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에 담긴 음악들을 들으며 퇴근하는 길의 연우는 행복해 보였을 것이다. 반면에 오랫동안 입사를 희망했던 회사에서 3차 인터뷰 끝에 불합격 소식을 들었거나 가장 사랑했던 남자친구와 헤어지던 날의 연우는 불행해 보였을 것이다. 연우의 삶은 행복한 걸까, 불행한 걸까? 연우의 삶은 실패일까, 성공일까? 한때는 미래를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의 노력이 의미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고 싶었다. 지금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이던 실패던 순간일 뿐이고, 인생이 끊임없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미래를 모른다는 건 어쩌면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결과가 무엇이건 간에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과정들을 지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결국 삶을 이끄는 것은 결과보다 희망이고, 살아가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들 속에서 힘이 되는 것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한 방의 성공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영진과 함께 했던 순간과 같은 것들 인지도 모른다. 연우의 삶이 행복이냐 불행이냐, 혹은 성공이냐 실패냐를 판단하기엔 너무 이르기도 하거니와,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연우 자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