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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뿐사뿐 걷기 Mar 18. 2022

기분이 나빴습니다

마흔 육아 일기

 최근 당근 거래가 부쩍 늘었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아들의 방을 정리하다 보니 꼬꼬마일 때부터 갖고 놀던 장난감이며 책을 처분하게 된 것. 주변에 나눠줄 아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어린 자녀를 둔 지인도 없고, 친정 남동생이며 시집의 형제들도 ‘어쩌다 보니 솔로’인 상황. 남들은 사촌 형제끼리 옷이랑 장난감, 책 등을 잘 물려 쓴다는 얘기를 들으면 은근히 부럽다. 물질적인 도움을 주고받는 것도 있지만 함께 아이를 키워가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아이의 나이대별로 먼저 키운 형제의 조언도 들을 수 있으니 마음이 얼마나 든든할지. 한마디로 급할 때 비빌 언덕이 생기는 기분이지 않을까? 몇 년에 한 번씩 아이의 물건을 정리할 때면 드는 아쉬움이다. 


 쓸만한 장난감과 책을 당근 마켓에 올리다가 집에 안 쓰는 메모리폼 방석이 눈에 띄었다. 얼마 전 온라인 서점에서 굿즈로 산 방석이었는데 예쁜 디자인과 무관하게 너무 불편해서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내친김에 당근 마켓에 올렸는데 금방 연락이 왔다. 다음날 오전으로 약속이 잡혔다. 약속 시간 몇 분 전, 도착했다는 채팅을 받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보통 어색하고 어정쩡한 표정으로 ‘당근이세요?’라는 말을 건네는 게 일반적인데. 나는 잠시 당황했다. 채팅을 다시 확인했더니 ‘모닝요‘라는 마지막 글이 보였다. 그제야 주차장 쪽을 보니 아이보리색 경차 한 대가 당장이라도 출발할 기세로 주차장 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여성 구매자는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방석이 담긴 비닐을 들고 뛰어갔다. 구매자의 한 손은 핸들을 잡고 있고, 한 손에는 돈이 쥐어져 있었으므로 나는 얼른 돈을 받고 그 손에 비닐을 쥐어주었다. 구매자는 비닐을 받음과 동시에 차를 출발시켰는데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급하게 인사를 했는데 뭐라고 인사를 했는지도 잊어버렸다. 

 모닝은 금방 자취를 감추었고 내 손에는 이천 원이 들려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물건을 주고 돈을 받았으니 거래는 깔끔했다. 그런데 내 기분이 왜 이렇지? 마치 드라이브 스루에서 일하는 점원이 된 기분이랄까? 처음에는 이런 생각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가 곧 별일도 아닌 걸로 쪼잔하게 구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더 기분이 나빠졌다. 




 사실 당근에서는 비싼 물건은 잘 거래하지 않는다. 일상의 소소한 물건들을 저렴한 가격에 거래하거나 무료 나눔을 주로 한다. 그러다 보니 거리가 좀 멀면 거래가 성사되기 힘든데, 그 말은 대부분이 근처에 사는 같은 지역 사람이라는 뜻이다. 요즘은 한 아파트에 살면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어쨌든 당근 거래를 통해 ’ 마침내‘ 얼굴을 마주하게 된 이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어떤 기대감을 가졌나 보다. 1분도 채 안 걸리는 한시적 인간관계지만 짧게 주고받는 인사 속에서라도 약간의 따뜻함 같은 우호적인 인간관계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쨌든 필요한 물건과 돈을 교환하는 건조한 관계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이길 기대했나 보다. 


  얼마 후, 또 한 번의 당근 거래를 했다. 이번에는 아이가 어릴 때 좋아했던 소전집이었다. 워낙 좋아해서 두 권 정도는 찢어진 부분을 테이프로 붙이기도 했는데 나머지는 깨끗해서 무료 나눔을 했다. 이번에야말로 쿨하게 거래를 끝내겠다고 다짐했다. 괜히 질척대지 말자고. 이번 구매자는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에 방문했는데, 1층에 내려가니 이미 기다리고 계셨다. “당근이세요?”라는 암호를 교환한 후 종이가방 두 개에 나눠 담은 책을 건넸다. 그랬더니 이분은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시는 게 아닌가. 예상치 못한 찐한 감사 인사에 나도 덩달아 마주 절을 하게 됐다. “네... 잘 사용하세요.” 돌아오는 엘리베이터에서 책이 좀 더 깨끗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약간의 미안함과 그 집 아이가 재밌게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단기간 내에 태도가 극과 극인 두 명의 구매자를 경험하고 나니 직거래를 하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또 어떤 구매자를 만날지 몸을 사리게 된다고 해야 할까. 중고 거래를 위해 사진을 찍고, 설명을 써서 올리는 것도 꽤 번거로운 일이라 평소에는 이런 작업(?)을 미루는 편이다. 그래서 이렇게 발동이 걸렸을 때 해치우지 않으면 언제 또 중고마켓에 접속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금 더 시도해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사용하지 않은 블루투스 이어폰. 겉 포장만 뜯은 것으로 사이즈가 맞지 않아 빨리 처분하기로 했다. (귓구멍이 작아서 작은 이어폰만 사용합니다) 사은품으로 받았던 제품이라 환불도 안 되고 나에게는 무용지물이라 다른 중고 판매자보다 조금 더 싸게 내놓았더니 금세 연락이 왔다. 낮 1시에 찾아온 중년의 남성은 택시운전사였다. 현금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바로 계좌입금을 해주셨는데 이어폰을 건네자 마스크 너머로 행복한 미소가 느껴졌다. ”이거 온라인에서 되게 비싸게 팔고 있던데... 이렇게 싸게 주셔도 돼요? “라는 목소리에는 횡재한 사람의 기쁨이 담겨 있었다. 쓰던 이어폰이 고장 나서 구입하게 됐다는 아저씨. 신이 나서 개인 사정을 얘기하시는 모습에 조금 싸게 팔 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저씨의 기쁨이 나에게도 이염되었는지 마치 내가 횡재한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중고거래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스치듯 만났다. 늘 어색하고 썰렁했지만 대체로 웃으며 마무리되는 거래였다. 하지만 한동안 방석을 판매했던 기억 때문에 마음이 들썩였다. 어쩐지 무시당한 것 같다는 마음의 속삭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사소한 일을 훌훌 털어내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도 불만이 생겼다. 방석 구매자의 닉네임을 보면 아이가 셋이나 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집에 아이를 혼자 두고 와서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랬을 거라고. 역지사지의 정신을 발휘해 피치 못할 상대방의 입장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런 이유를 떠올리는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내 안의 심판관에게 말했다. 공정한 척하지 말고 그냥 내 편 좀 들어줘.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자꾸 변명하거나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를 묻는 피곤한 짓은 이제 그만하자고. 나도 마음이 있다고. 그날은 정말 기분이 나빴다고.      


’ 그래, 기분 나쁠만했네.’ 

왜 이 말을 빨리 해주지 못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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