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송 Aug 28. 2024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얼마 전 여러 책에서 언급되었기에 꼭 읽고 싶었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다.

대표적인 '부조리극'으로 불리는 이 희곡은 아주 가볍게 인간사의 부조리를 연출한 것이 아닌가.

존재란 무엇인가?

<이방인>에서 아주 강렬하게-살인을 통하여- 이 질문을 던졌다면,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가볍고 명랑하게 관객에게 의미를 부여하도록 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카뮈의 <이방인>과 비교하게 되었다.

<이방인>의 아주 강렬한 책의 맨 처음 문장에 비해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그게 어제였나. 잘 모르겠다.")

극의 맨 처음은 에스트라공이 맞지 않은 신발을 벗기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정말 별 의미가 없다.)

극의 전개는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가 누군지 모른다.

책의 중반부를 달려가면서 고도가 실존하긴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확실하게 고도를 기다린다.

물론 본인들이 고도를 기다린다는 사실도 까먹긴 하지만.

여전히 고도를 기다리고, 극은 막을 내린다.

나에게 <고도를 기다리며>는 확실한 부조리극이다.

누군가에게 오지 않는 고도는 '침묵하는 신' 일 수도, '자유' 일수도, '고도의 정체' 일수도 있을 듯하다.

하나 중요한 사실은 우리 모두 고도를 보지 못한다.

극 안에서 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과 함께 오지 않는 고도를 같이 기다릴 뿐이다.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부조리가 아닌가?

이것이 부조리인가?

사실 이것이 부조리인지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맞긴 한 건가?

그리고 오지 않는 고도가 정말로 온다면 그 이후에는 어떡할 것인가?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겠지만,

내가 첫 번째로 떠올린 것은 우리 인간의 삶일 것이다.

태어나서 '좋은 대학교' 이후에는 '좋은 직장' 이후에는 '안정된 노후' 그리고 죽음.

이 회귀의 수레바퀴 속에서 고도 씨는 오시는가?

나에게 고도는 무엇인가?

내가 진정으로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인가?

극 중에서 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은 사뭇 진지하지만

그들이 고도를 기다린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모습을 보는 관객들은 피식 웃을 것이 분명하다.

왜 태어나 왜 살고 왜 죽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그저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하는 카뮈의 물음이 사뭇 진지하게 다가왔다.

여러 의미를 억지로 부여하며 살아왔지만,

정작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염세적 사고에 사로잡힌 나는 또 고도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중이다.

극 바깥의 관객은 피식 웃을지 몰라도,

현재의 나로서는 그저 고도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더 좋은 선택지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