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이 발명을 있게 한다. 결핍이 발전하게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불편하지도 않고 뭔가 부족하지도 않은 움직임 없는 고요한 시간이 존재의 이유를 묻게 한다.
스스로가 성장기인 시기나 자녀가 성장기인 경우 날마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다. 날마다 왜 그리 무슨 일이 많았었던지 '이 또한 지나가리니!'를 읊조리며 견디고 버티고를 반복했었다.
간혹 시끌벅적한 시간이 그리워지기도 하고 긴 고요가 낯설기도 하다. 긴긴 시간을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잘 모르고 뭔가 이뤄야 된다는 강박으로 뛰고 또 뛰고를 쉼 없이 했었다. 이제야 '지금도 꼭 그렇게 살아야 하나?'를 스스로 묻고, 왜 사는지도 묻는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도 살아보고 또 그것이 아닌가 하여 다르게도 살아보곤 한다. 그러다가 마음 둘 곳 없어서 피드백이 크게 기대되지 않는 애완동물들을 향해 애정을 쏟고 산다. 그런 사람들처럼 요즘 난 식물에 애정을 쏟고 산다. 텃밭은 물론이고 집의 여백은 모두 식물로 채우고 있는 중이다.
어제는 척박한 직장 내 정원에 자갈이며 이름 모를 알뿌리 등을 캐내고 퇴비를 고루 뿌린 후 채송화를 심었다. 꽃꽂이를 했기에 별 기대도 없었는데 오늘 아침 출근을 해보니 다섯 송이나 꽃을 피었다.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 수준이었다. 너무나 예쁘고 반가워서 지인들에게 예쁜 채송화를 보내고 놀라운 마음을 공유했다.
나를 기르고 자식을 기르고 이제는 식물들을 기른다. 변화하고 성장, 발전하는 모습에 희열을 느끼며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 와중에도 근본적으로 내 존재 이유를 궁금해한다. 결국 살아내는 과정에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며 산다. 그 과정이 원석을 보석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어떤 설명 없이도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방황하지 않을 것 같다. 세계 곳곳에 존재 자체로 큰 감동을 주는 예술품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지는 않았을지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감동을 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내게 존재 자체가 감사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 역사 속 인물도 아니고 우리 엄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냥 소박한 서민이다. 그럼에도 내겐 영원히 존경하는 인물 1순위가 우리 엄마다.
수많은 일들을 함께했기에 가까이서 면면을 보아왔다. 그럼에도 난 우리 엄마를 닮고 싶어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엄마처럼 살고 싶다. 욕쟁이 할멈 같은 우리 엄마를 난 왜 우직한 소처럼 생각할까? 평생을 희생하시고도 절대 당신의 공치사를 한적 없고 자식들에게 더 못해줘서 미안하게 생각하며 끝끝내 짐이 되지 않으려 발버둥치신 우리 엄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라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