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순풍 항해중입니다
바람이 나를 때리고 멀리 내뺀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도 뜨기 힘들어
앞을 내다보며 걷기란 쉽지 않다.
제주의 바람은
드세기가 미친년 손아귀 같아서
한 번 휘둘리면 정신마저 사납다.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싸매다가
결국......
가던 길을 돌아선다.
나를 처음으로 후려친 바람은 중3 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서른여섯의 나이에 아이 다섯을 혼자 떠맡게 된 엄마의 뼈를 닳게 하고, 척추를 휘게 하는 노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제부터 아빠고, 너가 엄마야."
둘만 앉아 있던 어둑한 방 안, 비장한 엄마의 목소리가 이직도 내 몸 깊숙한 곳에서 잠수하고 있다. 나는 엄마의 남편이었고, 네 명의 동생들에게는 엄마여야 했다.
그때는 젊은 엄마가 우리를 버리지 않았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이웃들의 말, '아방 없는 호래자식'으로 버릇없이 자라서 손가락질당하면 안 된다는 엄마의 교육관이 원죄 의식처럼 우리를 가두었다. 무심한 어른들로 인해 우리는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쓸모 있어야 했고,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자랑스러운 딸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게 나의 바람이었다.
좋지 않은 머리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 엄마의 따스한 눈길 한 번, 정감 어린 말 한마디를 위해서 나는 정말 노력했다. 가족이 모두 잠든 시간, 나 혼자 깨어 잠든 엄마와 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보면 눈물이 나는 날들이었다. 공부만이 내가 살 길이었다.
"첫째가 잘 돼야 동생들도 잘 된다."는 말이 나에게 해주는 어른들의, 무자비한 격려이자 채찍과도 같은 응원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폭삭 속았수다> 마지막 회, 관식의 죽음을 보다 엉엉 울었다. 사람마다 우는 포인트야 다 다르겠지만, 그날 티브이 앞 소파에 앉아 울고 있는 나는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는 게 서러운, 어린 소녀였다. 나 역시 아빠를 잃은 16살의 아이였는데, 어른들은 아이의 상실과 아픔에는 관심이 없는 시대였다. 그렇게 나는 그 누구에게도 위로받아본 적 없고, 스스로 애도의 시간을 가져보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
나의 바람을 날려버리고, 나를 패대기친 바람은 대학 2학년 때 휘몰아쳤다. 요즘은 모르겠으나 그 당시는 사범대학 등록금이 많이 쌌다. 가난한 집 장녀에게는 그나마 가장 나은 선택 지였다고나 할까? 무례한 주위 사람들에게서 딸내미 대학 보내서 뭐 하냐는 말을 들으면서도 엄마는 나를 대학에 보내셨다.
그런데 만성적인 교사 발령 적체에 대한 졸속적인 해결책으로, 의무 발령제였던 교사 임용이 임용고시제도로 바뀐다는 거였다. 그 시절 꽤나 정의로웠던 우리는 수업 거부, 시험 거부로 전 과목 올 F를 감수하며 싸웠지만, 결국 법은 통과되었다. 주책과 나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은 임용고시를 보지 않았다. 시험으로 걸러지는 교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지금은 좀 치기 어린것 같지만 그 당시에는 미래를 포기할 만큼 비장한 결심이었다. 딸이 교사가 될 모습만 바라던 엄마에게는 정말 크나큰 배신이었겠지만 후회는 없다. 다만 가끔 나는 어떤 국어 선생님으로 교단에 서 있었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바람이 내 곁에 머물고 있다.
따스함이 나를 감싼다.
몸이 풀려 바람을 맞으며
어디든, 얼마든 걸을 수 있을 듯하다.
이완된 정신은
내 삶의 장벽들을 만만하게 보이게 하고,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겠다는
호기로움을 불어넣는다.
올 F의 여파로 뒤늦은 졸업을 하고, 그다음 해에 결혼을 했다. 스물여섯에 첫 아이 출산, 마흔셋에 둘째 출산. 그 사이에 밤새 나를 뒤척이게 하고, 눈물짓게 했던 바람이 어디 하루이틀 일이겠는가.
그런데 작년부터 나를 휘감는 바람이 달라졌다. 귀하고도 고마운 우연들이 겹쳐, 작년 4월에는 그림책을, 7월에는 <아티스트 웨이> 프로그램을 만났다. 거대한 태풍은 바다를 뒤집어엎어 해양 환경을 '리셋'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착한 태풍을 만났다. 그림책을 만나고서야 나는 내가 원하는 것, 나의 바람과 취향을 생각할 틈을 가지게 되었다. 아티스트 웨이를 통해 150일간의 모닝페이지를 쓰며 나는 엄마와 세상 사람들에게 끈질기게 갈구했던 인정 욕구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내 안에 웅크려 있던, 열여섯의 나이에 성장을 멈춰버린 소녀를 다독여 위로하고 포옹하고 포용할 수 있었다.
요즘의 나는 매주 도서관과 서점에서 그림책 동지들과 함께 그림책을 같이 보고, 귀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티스트 웨이 친구들과는 원작이 있는 영화 보기와 미술관 산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만남과 공부가 있는 삶에 신이 난 나는 문화센터, 도서관, 서점을 섭렵하며 그림책 공부, 도자기 공예, 심지어 도망만 다녔던 글쓰기 강좌까지 듣고 있다. 3주 전부터는 수지침도 배우고 있디. 일주일이 책과 문화, 사람들과의 만남과 수다로 신나게 돌아간다. 바람이 나도 큰 바람이 난 게 틀림없다.
저 바람처럼
나의 바람(wish)도
내 곁에 따스히 머물기도 하고,
나를 후려치고 저 멀리 내빼기도 한다.
요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참 '유쾌한' 사람이라 말한다. 내 '글'이 재미있다 한다. 한 번도 칭찬받으며 살아본 적 없는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머뭇댄다. 엄마에게 야단맞아 잔뜩 주눅 들었다가, 지나가는 이웃에게 사탕을 받은 것처럼, 기분은 좋은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모르는 7살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10대에 지워진 어린 엄마로서의 짐, 올곧고 정의로운 청년이고 싶었던 20대의 무거움, 아이를 키우며 반성과 자책으로 하루를 마감하던 3~40대를 지나, 지금의 나를 감싸고 있는 바람은 초속 3~4 미터의 살랑살랑 바람이다. 아~ 바람 좋~~ 다.
유쾌하면서 다정한 사람, '말랑말랑'한 사람이 되는 게 매년 1월, 다이어리 제일 첫머리에 쓰는 나의 바람이었는데, 나는 차츰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