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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Nov 15. 2023

인생,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

직장인들끼리 모여서 하는 이야기 중에 가장 신나는 주제가 바로 ‘로또에 당첨되면 나는’이다. 가장 먼저 부동산에 투자를 하고 나머지는 펀드에 넣어놓고 회사는 계속 다닌다거나, 당장 퇴사하고 해외여행을 다니며 탕진잼에 빠져 살 거라거나, 요즘 1등에 당첨되면 얼마나 나오나 묻는 사람 꼭 있고,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당첨자 나오면 맛있는 거 크게 한방 쏴야 한다는 약속을 하면서 끝이 난다.


‘처음부터 인생을 다시 살게 된다면’도 비슷한 결의 질문인데, 마치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은 선물을 설명하는 아이처럼 희망차고 설레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한번 해보자.


일단 인생의 가장 큰 목표를 ‘장인 되기’로 설정한다. 어느 한 분야를 붙잡고 그 한 놈만 패는 전략이다. 축구다 이러면 손흥민이 될 때까지 축구만 파거나, 뮤지션이다 이러면 지드래곤이 될 때까지 주야장천 음악만 뽀갠다. 인생 전체를 크게 아우르는 목표를 ‘장인 되기’로 잡아 놓고 이제 세부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조사 활동에 착수한다. 초등학교.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시간이 빨리 가고 빠져들어 몰입하는지를 관찰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 외에 소질이 있어 보이는 것도 하나 더 찾는다. 플랜 비를 고려하는 건데, 내 인생을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투 트랙으로 진행시킨다.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삐끗해서 선수 생명이 아작나는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까 그때는 얼른 음악으로 전향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이다. 캬. 시작이 좋다. 계속해 보자.


초등학생 때 나는 그림 그리기를 참 좋아했는데 기왕이면 틀에 갇히지 않은 걸 좋아했다. 책상 위에 사과를 그대로 똑같이 그리는 건 뭔가 심심했다. 그럴 땐 꼭 사과에 눈 코 입을 그려 넣거나 아니면(선생님이 무서울 경우) 대충 빨리 그려놓고, 뒷장에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구 낙서를 했다. 그래서 특히 좋아했던 그림 주제가 ’그리고 싶은 거 아무거나 그리기‘였다. 내 그림을 보여주고 ’특이하다‘라는 피드백 받는 걸 좋아했는데 ’똑같이 잘 그렸네‘보다는 그게 훨씬 더 좋았다. 오케이, 크리에이터 기질 발견. 그리기 쪽으로 목표를 잡는다. 내 인생의 목표는 지금부터 그리기 장인이 되는 것이다(꼭 전통 미술이 아니더라도 디자인이나 웹 툰 같은 넓은 의미의 ‘그리기’를 의미함). 기본기는 있어야 하니까 엄마를 꼬셔서 미술 학원에 등록을 한다. 학교 공부는 딱 중간 등수 정도만 유지를 한다. 수업 시간에 딴짓 안 하고 시험 기간에만 좀 집중하면 중간은 문제없다. 학교 공부에만 너무 올인하는 건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시간 낭비다. 그림 그리기로 목표를 잡았다면 그것만 보고 달리는 게 맞다.


아까 이야기한 플랜 비가 남았는데, 그건 지금 당장은 급하지가 않다. 중학교도 있고 고등학교도 남아 있어서 천천히 생각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내 신체가 앞으로 어떻게 발달할지 아직 모른다. 2차 성징을 완료하고 나서보니 어머, 비주얼이 너무 잘 빠지게 나왔다고 한다면, 미술이고 뭐고 인생 재설계 들어가야 한다. 일단 킵.    


중학교는 가급적이면 애니메이션이나 미술 쪽으로 특화된 곳으로 알아본다. 마땅한 곳이 없거나 진입 장벽이 너무 높다면, 그냥 홍대 근처에 있는 중학교라도 간다. 성적은 마찬가지로 중간 정도에서 유지. 그림만 그린다. 슬슬 대회에 출품도 하고 인터넷에도 올려본다. 내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살핀다.


중학생 정도 되면 버스 타고 동네 이동 정도는 가능할 테니 인터넷 동호회나 학원 같은 걸 이용해서 커뮤니티에 속한다. 인맥도 쌓고 정보를 공유하면서 인사이트를 얻는다. 중학생이 되면 사춘기가 오니까 그림 그리기도 재미 없어질 수도 있고 다른 분야에 눈이 가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 음악이 아닐까 싶은데 왜냐면 내가 밴드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제발, 밴드는 돈이 안된다. 미디 학원을 다니자. 연주할 수 있는 악기 하나 정도 하고 미디로 음원을 찍는 걸 플랜 비로 가져간다. 그림을 매일 그리고, 지겨울 땐 음원 찍고. 이렇게 두 개로 간다.


고등학생이 되면. 자, 이제는 두각을 좀 나타내 줘야 한다. 아직 완벽하게 여물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눈치 없이 폭발할 수 있는 그런 시기가 되어야 한다. 이때가 특히 중요한 게, ‘학생’ 메리트 때문이다. ‘000 하는 고등학생’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다. 곧 스무 살이 되면 수많은 스무 살 성인들 사이에 묻혀버린다. 그러니 지금 뭔가 나와줘야 한다. 그러면 이후 진로를 정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다. ‘그래, 이거야. 난 이 길로 가야겠어’ 같은 확신 말이다.


그런 거 없이 그냥 평이하게 간다는 전제로 계속 살펴보면, 대학교 진학을 고민해야 할 시기가 올 것이다. 가급적이면 어디든 대학은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같은 스무 살이라도 그냥 ‘사회인’보다는 ‘대학생’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훨씬 기회도 많고, 가진 실력 대비 후한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000 하는 대학생). 대학교는 문화적 소양을 함양할 수 있다는 소소한 의미도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대학생 타이틀은 가지고 가는 게 좋겠는데, 만약에 그 시기에 우리 집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서 빚을 내야 하거나, 스스로 벌어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면, 과감하게 대학생이라는 수식어와 문화적 소양 따위는 개나 줘 버릴 수 있다. 대학생 타이틀은 아주 살짝 유리하다는 거지, 많이 중요하진 않으니까.


나머지 스무 살 이후부터는 성인의 관점에서 지금껏 쌓아놓은 실력을 발휘하는 쪽으로 십 년을 보낸다. 등단을 하든 관련 업종에서 직장 생활을 하든 회사를 차리든 뭐든 쌓인 재능이 금전적 가치로 환산될 수 있도록 아웃풋에 집중한다. 그렇게 독보적인 장인으로 살면서 내가 행하는 일은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되게 한다. 그리고 그런 활동이 곧 나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어 앞으로도 쭉 계속 그 일을 하면서 인생을 주도적으로 산다.


만약 실패한다면? 크게 성공하지 못한 무명의 예술가로 남는 경우에는 서른 살에 일반 사무직으로 취업을 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쳐서 합격하면 된다(원한다면). 그래서 일단 서른 전까지는 ‘장인 되기’ 목표 아래 달려보는 것이 가능성 면이나 성공의 관점에서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만 할 수 있는 일. 오직 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 그게 바로 모든 직장인들이 로또 1등보다 부러워하는 것이고 아, 대학 가지 말고 기술을 배웠어야 했어 하며 진심 어린 한탄을 하는 이유이다. 아마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산다고 하면 바로 그런 능력을 지니기 위해 인생을 바쳤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전격 회귀 에세이 ‘미술학원 막내아들’ 여기까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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