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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Dec 18. 2023

쿨한 당신은 나의 남자

코스트코 반품 숍에 자주 간다. 코스트코에서 파는 물건 중에 반품된 제품을 대량으로 떼와서 저렴하게 파는 가게다. 사용감 있는 중고도 있고 포장도 뜯지 않은 새것도 있고 전자제품부터 의류까지 종류도 다양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말에 ‘대량 입고’ 문자를 받고 서둘러 가보면 숍에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것저것 다 있는 게 마치 시장 같기도 하다. 가격표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제품도 있어서 ‘이거 얼마예요?’, ‘응, 언니 그거 3만 원에 가져가’ 식의 대화도 오고 가는 거 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50대 초반의 마르고 키 작고 둥근 안경테를 끼고 있는 아저씨가 의류 코너에서 바지를 자기 몸에 대어보며 거울 앞에 서있었다. 아내와 같이 있었는데 짜증이라고 해야 할지 일상화로 고착된 무미건조함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다정함 없는 말투로 말을 툭툭 내뱉고 있었다. ‘이건 안 맞는다니까’, ‘색이 별로야’, ‘너무 작아’ 뭐, 그 나이대 아저씨들 다 그렇지 생각하면서 나는 내 사이즈에 맞는 리바이스 청바지를 열심히 뒤적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저씨의 아내가 어떤 물건을 가져왔고 이거 어떠냐며 물어보는 상황이었다. 둘이 소곤소곤하다가 갑자기 아저씨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아니, 내가 그걸 사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어쩌고 저쩌고 퉁명스럽게 아내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다. 꼴란 거 그거 얼마 한다고 아내를 세워놓고 무안을 주고 있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충분히 다른 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텐데, 훈계하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자체가 같은 남자로서 너무 부끄럽고 싫었다. 그래서 리바이스 청바지 포기하고 저리로 가버렸다.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할 에너지가 있다면 정의롭고 공익을 위하는 일에 쓰면 얼마나 좋을까.


’저기 잠깐만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지금 당신의 행동이 얼마나 공익을 해하고 이기적이며 정의롭지 못한 행동임을 알고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그걸 아예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하며 불의에 맞선다거나,


‘정치인 여러분, 너무 민생을 저버리고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일에 몰두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물론 지금 하고 계시는 일도 나름의 의미는 있을 것이고 정치적 이유는 있겠기에 제가 지금 그런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라고 하면서 타인을 대변해서 용기를 낸다거나,


‘사장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지금 직원들이 얼마나 피해를 보고 계신 지 알고 계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제가 물론 그걸 다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만,’ 할 때 써야지. 와이프를 세워놓고 설명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아저씨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저씨는 지금 최대한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몹시 이성적인 사람이라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시간을 내어 너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너른 마음의 지성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고만 사라 고만. 돈 많나. 내려놔라이’가 아니라, 왜 네가 이걸 사면 안되는지, 왜 이 제품이 우리 집에 필요 없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자 하는 행동이다. 물론, 짜증과 무미건조함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는 태도이긴 하지만 어쨌든 스스로 최대한 절제하고 있는 중이다. 누굴 위해서? 내 앞에 너를 위해서.


내가 그걸 왜 이해하고 있냐면, 얼마 전에 아내에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근데 미안한데’로 말을 시작하면 그때부터 듣기가 싫다고 한다. 상대 의견에 반박을 준비하는 시작 멘트인데 ‘저기 미안한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 왜냐면’이라거나, ‘근데 있잖아 미안한데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거든 기억이 조금 잘 못된 거 같은데’ 같은 식이다. 사람 질리게 하는 말투이자 화법이라고 했다. 그때는 그냥 웃고 넘겼는데, 이 아저씨 말하는 걸 듣다 보니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만약에 오랜 된 부부가 아닌 갓 나온 따끈한 연인 관계였다면 어땠을까. ‘좋은데? 잘 골랐어. 역시 보물찾기 달인이라니까’라며 우선 칭찬을 깔아주고, ‘그런데 집에 비슷한 게 있으니까 조금 더 찾아보자. 더 좋은 게 분명히 있을 거고, 당신은 그걸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거야’라며 자존심 다치지 않게 잘 넘어가거나 그래도 무조건 사려고 한다면 내 가계에 큰 무리 없는 선에서 그러라고 했을 것이다.


말투가 기분 나쁜 포인트는 아마도 애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일 것이다. 돌아오는 피드백이 오직 비난과 훈계뿐이라면 애정을 느낄 수가 없다. 어떤 실리적인 도움이 있건 간에 남녀관계에 훈계는 그냥 기분 나쁘고 섭섭하다.


말을 예쁘게 해야겠다.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해서 내 자존감을 사수하는 도구로 상대방을 사용하지 말아야겠다. 익숙한 것에 무감각해지지 않으려면 계속 생각하고 인지하는 수밖에 없다. 메시지를 담아서 이야기를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는 애정을 먼저 한 스푼, 그리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반 스푼 정도만 넣어야겠다. 그렇게 말 참 예쁘게 하고 쿨하고 스위트한 남자로 리콜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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