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이 동강 나기 전에

잔치큐레이션 4

by 왕잔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호랑이가 담배를 핀다고 떼를 쓰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벌써 꺼드럭댄다고, 곰방대로 옴팡지게 얻어맞기도 한참 전 말이다. 하기사 그 시절에는 호랑이도 담배도 없었다. 세상은 검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흰 것도 아니었다. 세상만사 어둠이 있어야 빛도 있는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고, 또 모든 게 있었으니, 무엇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약간의 사대주의를, 혹은 서구식 보편성에 호소하자면, 왜 그 창세기에 나오지 않는가, 칠흑 같은 어둠과 물이 섞여 있던 시절 말이다. 그 유명한 “빛이 있어라!”가 존재하지 않던 시간.


내가 직접 골라 온 비유이긴 하지만, 여기에 석연찮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무엇도 구분되지 않던 세계에, 대관절 어떤 타자가 자신을 홀로 구분 지어 질료 그 자체에 명령을 내린다는 말인가? 내가 가만히 느껴 보니 나는 유일무이하고, 너는 땅이고, 넌 하늘이고, 넌 물방개고 하는 식이라는 건데, 이성의 본질이 분류라고 부르짖는 그들이건만, 정작 분류의 기원에 관해서는 다분히 감성적이다. 그렇다고 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닭이 별로면 꿩으로 눈을 돌릴 뿐이다. 그렇게 주욱 동쪽으로 시선을 옮겨 보면, 사람 사는 것이 다 지척이니, 여기도 시작은 그리 다르지 않다. 혼란스러운 덩어리를 담뿍 담은 알이 있다고 운을 떼니까. 이 알 속에서 도대체 어떤 복잡하고도 정교한 과정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여하튼 천신만고 끝에 그 안에서 반고라는 존재가 빚어졌다. 이 반고라는 녀석은 무럭무럭 자라기를 거듭하더니, 비로소 이 세상이 좁아터졌다는 것에 분노하여 자신의 유일한 보금자리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요리 좀 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그저 알을 깨는 거야 갓난아기도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도 하겠지마는, 아주 박살을 내어서 그 조각이 아래로 흩어진 것은 땅이 되고, 위로 튀어 오른 것은 하늘이 되도록 만드는 일은 일찍이 시도했다는 사람조차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그래서 그가 거인으로 불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능력이 출중한 반고도, 두려워서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생각해 보라. 내 머리 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계란 껍질들이 즐비해 있는데, 저것이 도통 무엇에 고정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언제 내 머리 위로 곤두박질칠지 알 방도가 없으니, 뭔 일이든 손에 잡힐 리가 없다. 그는 태초의 보이스카웃 정신을 발휘하여 뛰어난 계획을 세웠다. 늘상 하늘을 떠받치면 떨어질 일도 없다는 거다. 그래서 모르긴 몰라도, 곧 땅이라고 불릴 계란 껍질 위에 서서, 그는 한 만 팔천 년 정도 하늘을 들고 있었다. 고서古書는 꼭 일만 팔천 년 뒤에, 그가 마침내 만족감을 느끼며 누워서 잤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안타까운 과로사를 퍽 아름답게도 적어 두었다. 지칠 대로 지친 그의 육신은 빠르게 분해되었고, 그렇게 바다가, 산맥이, 만물이 자연스레 화하게 되었다.


반고에서 비롯된 만물은 구분되기를 거부한다. 애초에 하나였기도 하메, 그 누구도 네가 정확히 무엇이라고 정해 준 적이 없으니 말이다. 해서 가끔은 바다가 산을 덮기도 하고, 육지에서 편하게 놀고먹던 동물이 도리어 바다로 돌아가기도 한다. 만물의 변화가 반복되니 앞으로만 나아가던 시간도 결국에는 나선을 그린다.

잔치라고 다를쏘냐!


잔치의 ART, PLACE, PEOPLE 팀의 첫 글을 한 번 보도록 하자. 거인의 육체는 이제 막 동강 났다. 일 각도 지나지 않았기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때다. 1-1. 신촌타이거즈(VIDEO), 이때 아트팀은 아트라고 불리지도 않았다. ARTIST팀이라는 이름 아래, 신촌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밴드의 연주 영상을 기록하고, 그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인터뷰는 분명 피플팀의 과제일 텐데,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이, 신촌의 예술을 열정적으로 조명하기에 바쁘다. 그러면 피플팀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 제 밥그릇이 남의 손 아래서 공중제비를 돌고 있으니, 애간장이 다 녹아내리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들은 오히려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과제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었다. 1. 김규원에서 볼 수 있다시피, 피플팀의 첫 글은 공백을 포함해도 164자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은 특정 개인의 순간, 영화로 따지면 인물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24분의 1초, 그 한 프레임을 그려냈다. 중학생 시절부터 간직한 CD 한 장이, 본인 입으로 절절하게 전달하는 인생사보다 더 진실된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태초의 플레이스팀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 놀랍게도 그들은 그때도 자신이 신촌에서 애정해 마지않는 장소들을 세상에 널리 외쳤다. 1. 아름다운 시절은 그 사랑에 힘입었는지 1999년부터 2026년을 단 한 달 남기고 있는 지금까지 신촌을 지키고 있다. 다만, 플레이스팀이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어찌 되었든 거인 반고의 아종일진대, 순리에 벗어났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가장 최근의 플레이스 글은 인디 게임의 형식을 빌려 글을 적었다. 아트는 이한열 기념관을 소개했다. 피플은 스무 살의 젊은 유튜버의 삶을 분량에 구애받지 않고 그려냈다. 바다가 언젠가 산이 되듯, 물살이가 땅으로 올라오듯, 그렇게 잔치도 세상의 일부인 것이다. 우리의 불쌍한 반고는 죽어서도 쉴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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